[연재] 교과에는 나오지 않는 교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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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3장은 사도 바울의 투옥, 그리스도의 비밀, 그리고 독자들을 위한 기도로 서로 동떨어진 내용이 두서없이 나열되는 것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참고하면서 보면 3장의 내용이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으며, 2장과도 긴밀히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3장1절을 시작하는 헬라어 표현 ‘투투 카린’(τούτου χάριν)을 ‘이와 같은 까닭에’ 라고 직역해 봅시다. ‘이’것이 직전인 2장에서 논한 내용을 직접적으로 가리킴을 알 수 있습니다. 2장1절이 문법적으로 2장과 1장을 긴밀히 연결한 것처럼, 3장 또한 첫 마디를 통해 2장과 연결하는 것이지요. 2장에서 이방인의 과거와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뀐 현재와 미래를 논했는데, 이것과 3장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우리는 바울이 복음과 그리스도를 위해 투옥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보면, 바울은 이방인을 위해 투옥됐습니다. 3장1절은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혔다고 하지요. 3차 여행 직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당하는 내용을 담은 사도행전 21장을 참고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당할 때 예루살렘에는 바울 외에도, 야고보와 장로들 등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다른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보다도 바울을 집중적으로 배척하며 잡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지요. 사도행전은 이런 반응이 바울이 중간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였기 때문이거나, 다른 사도들보다 효과적인 전도자였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와 상관없이, 바울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과 교제하며, 이방에서 유대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행 21장28절 참조).
사도행전 15장에서 이미 교회는 이방인을 전도하며, 몇 가지 요긴한 것 이외에는 모세의 율법을 의무화하지 않기로 결의했습니다. 이후로 얼마나 많은 사도가 이방으로 나갔는지는 모르지만, 사도행전은 바울이 이방인들과 접촉하며 결의된 내용대로 가르친 것에 집중합니다. 바울이 이방에서 더 많이 전할수록 유대인의 비난을 더 집중적으로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 22장도 보십시오. 유대 지도자들은 바울이 긴 변증 끝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셨다고 하자, 그를 향해 ‘죽일 놈’이라며 소동을 일으킵니다. 한편 26장에서도 바울은 자신의 투옥이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한 것을 이유로 꼽습니다(20-21절). 같은 맥락으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도 자신이 이방인을 위해 갇힌 자가 되었다고 명시하는 것입니다(3장8절).
바울이 유대인 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만 전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사도행전 23장6-9절에서 바울이 자신이 심문받는 이유가 다른 바리새인처럼 부활을 믿기 때문이라고 언급하자, 듣고 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가운데 분란이 생깁니다. 바리새인 쪽의 몇 서기관들은 바울을 옹호하며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라고까지 하지요(23장9절).
이를 보면 그리스도의 부활 자체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연합해 바울을 배척하는 주요 이유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하거나 부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둘째 문제이고, 바울이 이방인에게 나아가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입니다.
유대 종교는 지금까지도 이방인 전도를 우려 혹은 배척하며, 이방인의 개종을 부정하기도 합니다. 현대 다원주의 사회의 영향으로 유대교 내에서도 개방적인 개인, 혹은 종파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정통파는 이방인의 개종을 불허하며, 개종이 가능한 종파 가운데서 개종의 과정은 매우 엄격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혼을 유대인 아닌 다른 가정에 태어나게 하시는 실수를 하셨습니다”라는 선언이 그 과정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만일 복음을 만민에게 전파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바울과 같은 헌신된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이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을까요?
바울이 만약 그리스도를 유대인 가운데에서만 전했다면, 그는 핍박이나 감옥살이를 겪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방인에게 간 것은 그가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통이 있는 길인가 없는 길인가, 나에게 이익을 주는 것인가 아닌가를 선택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고난이 있더라도 이방인에게 갔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두고 스스로에게 공을 돌리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3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행동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에베소서에 나오는 비밀은 알아가기에 끝이 없는 복음의 신비를 모두 일컫는데, 3장에서는 그 가운데 특별히 이방인을 향한 구원의 계획을 말하고 있습니다(3-6절).
유대인에게 잘 인식되지 않았을 뿐이지, 만민을 구원하는 것은 모두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마음을 바꾸신 것이 아니라, 이미 창조시로부터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지요(9, 11절). 여기서 ‘복음’의 중요한 요소가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하나이고, 한 민족을 넘어 ‘만민’에게 베풀어 주심이 또 다른 중요한 부분입니다.
3장13절에서 바울이 자신이 갇힌 것을 “너희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까닭입니다. 이방인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없었다면 바울이 이방인에게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가지 않았다면 바울이 투옥될 일도 없었겠지요. 따라서 그가 갇힌 것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태초부터 사랑하시며 구원하고자 하신다는 보증인 것입니다. 이 같은 까닭에 바울의 투옥은 이방인에게 있어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살게 하심을 보여주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2장의 설명에 따르면, 바울은 유대인이기에 본래부터 ‘특권 안에 있던 자’였습니다. 이방인에게 가는 것이 고난을 일으킬 것을 뻔히 알기에, 그에 대한 부르심이 짐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을까요? 3장7절을 보면, 그는 그 부르심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짐이 아닌 선물이라니! 거기에 더하여, 자신을 감옥으로 가게 한 그것을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 혹은 ‘힘’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구절에서 ‘일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종’ ‘사역자’ 혹은 ‘집사’라고도 번역되는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입니다. 이 단어는 디아(διά, ‘통하여’ ‘철저히’)와 코니스(κονις, ‘먼지’)의 합성어로 ‘먼저를 일으킬 정도로 돌아다니며 섬김’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생겨났습니다. 이방인을 ‘섬기는 자’로 표현한 데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온전히 복종한 모습을 볼 수 있지요. 자신의 고통에 집중하며 그것을 일으킨 이방인을 두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하며 그 사랑을 더 알아가도록 독자들을 독려합니다.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바울과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편견과 상식을 뛰어넘습니다(3장14절). 하나님께서 햇빛과 같은 따스함으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실 때, 마음을 열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더욱 알아가지 않겠습니까? 또한 다른 이들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바울과 같이 순종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를 상고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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