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교과에는 나오지 않는 교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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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속’을 지향하는 사회에 살다 보면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한때 우리는 책을 사기 위해 얼마간의 시간 동안 책값을 모아, 긴 시간을 걸려 서점에 가고 페이지를 하나씩 넘기며 감명 깊은 문구에 밑줄을 치고 명상하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 쏟았던 노력과 시간은 이제 핸드폰 하나와 손가락 움직임 몇 번으로 ‘절약’되고 있지요. 종이에 앉아 있던 글은 이제 우리가 눈을 감아도 들을 수 있는 음성, 영상 매체들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쉽게 이해되고, 빨리 지나가는 사회.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경은 멈춰 생각하길 요구합니다.
에베소서는 우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속성과 진리를 더 깊고 넓고 높이 알아가라고 합니다(1:17-19; 3:16-19). 또한 하나님이 없던 우리의 과거와 만난 이후인 현재와 미래를 지속적으로 기억하라고 합니다(2:11). 이같이 진리를 이해하는데 진중한 관심과 노력 그리고 시간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나서도 깨달은 것을 삶에 적용하는 데에는 겸손한 자세와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지요. 에베소서 5장도 이러한 강권을 이어갑니다. 5장15절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라고 말씀하시며, 17절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러한 권고를 바탕으로 이번 호에서는 특별히 5장을 시작하는 두 구절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저는 지난 몇 회에 걸쳐 <에베소서>에 독립적으로 보이는 각각의 내용이 어떻게 서로 연결돼 있는지 설명했습니다. 문장과 문단 사이 연계성은 전체적인 문맥에서 주제와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독립적으로 시작하는 것과 같은 5장의 첫 구절도 사실상 4장 마지막 구절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4장32절과 5장1~2절은 똑같이 기네스떼(γίνεσθε, “be,” “되어라”)로 시작해 카또스(καθὼς, “just as,” “~한 것과 같이”)로 시작하는 구문을 갖습니다. 구조와 주제도 유사해 사실상 함께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이후로 다루지는 않겠으나, 사랑의 표현으로서 4:32에서 용서가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5장과 함께 두고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5장 1~2절은 그 전 구절인 4장32절뿐 아니라 그 이후에 나오는 다른 구절에서도 반복되는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행하라’로 번역되는 페리파테오(περιπατέω)는 2절, 8절, 15절에서 같은 형태로 반복되며, 위에서 언급한 카또스(καθὼς)는 4장32절과 5장2절 외에도 5장3절, 25절, 29절에서 나옵니다. 이렇게 반복되는 요소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며 문맥적 흐름을 생각해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1~2절에서 나오지는 않지만, ‘~하지 말고 (매, μή 혹은 우, οὐ), 대신 ~하라(말론, μᾶλλον 혹은 알라, ἀλλὰ)’는 구조도 여러 번 반복되는 것도 참고하세요(3~4절, 11절, 15절, 17절, 18절, 27절, 29절; 6장4절, 6절, 12절. 5장24절에서는 <알라>만 사용됨).
이제 다른 구절과의 연계성을 접어두고 5장 1~2 구절의 특성과 의미를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헬라어의 어순은 한국어와 달라서 원문에서 기록된 순서대로 다루고자 하면 이 부분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여기서 인상 깊은 것은 본받는 것을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고 ‘본받는 자’라는 정체성으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1장부터 하나님과 만물의 관계를 여러 번 언급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으며(3장9절), 모든 것 위에(ἐπὶ, “over”), 모든 것을 통해(διὰ, “through”), 그리고 모든 것 안에(ἐν, “in”)에 계시고(4장6절),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십니다(1장22~23절). 따라서 우리가 닮아가야 하는 부분은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넘어 하나님께서 만물 가운데에서 보여주시는 모습으로 확장됩니다. 바울은 마치 인간의 모든 관계를 실물교훈으로 보는 것과 같아서, 각 관계에서 그리스도가 하신 것과 같이 행동하길 기대합니다.
(2)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이 부분을 ‘사랑받는 자녀’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는 것은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원인이자 과거에 시작되어 멈추지 않고 진행되는 현재이자 미래입니다. 스스로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는 확신이 깊어지고, 그 사랑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배워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잘 반사하게 될 것입니다.
(3)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1)과 평행하는 부분으로, (1)에서 존재의 정체성을 다루었다면, 여기서는 그에 따른 행동을 요구합니다. 사랑 가운데에서 삶을 살아가는 모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구체적인 방법은 이 바로 뒤에 나오는 카또스(καθὼς) 구문에서 설명됩니다.
(4)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과 또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과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신 것 같이”: 조금 어색하지만 원문을 따라 제가 다시 번역한 부분입니다. 마지막에 번역된 ‘것 같이’가 원문에서는 이 구문을 시작하는 카또스(καθὼς)입니다. 한역판에서는 그 앞의 두 부분이 독립적인 내용처럼 분리돼 있지만, 사실상 카또스에 평행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사와 제물로 드리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신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으로 행하면서 똑같이 본받아야 할 내용인 것입니다. 피상적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희생의 모습을 그대로 따르고자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과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원어를 따르면, 제물과 제사가 모두 향기로운 냄새로 드려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받았으니, 빚진 마음으로라도 우리를 희생할 수 있습니다. 본받으라는 말에 의무감으로 자신을 복종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참 모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향기롭도록 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마음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기에 즐거운 마음이자 자원하는 심정으로 할 때 향기롭게 되는 것이겠지요. 예수님과 같이, 오늘 우리의 수고와 봉사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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