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3·1운동으로 형사피고된 재림교인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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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 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19.03.01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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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헌 교수 발제 ... 3·1운동에서 재림교회의 역할
그럼에도 불구하고 3.1운동 당시 전국에 60여개의 재림교회가 있었고, 신도수도 1500명을 상회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 민족적으로 전개된 만세운동에 재림교회가 직간접적으로 연계된 것은 분명하다.
역사적 사료에서 재림교회가 3·1운동에 참여한 가장 빠른 기록은 1919년 3월 6일에 있었던 평안남도 순안에서의 만세운동과 관련한 것이었다. 당시 평안남도 장관이었던 쿠도 오에이이치가 조선총독부 내무부장관 우사미 카츠오에게 보내는 보고자료에 의하면, 평남 평원군 순안에서 6일 오후 4시에 군중 약 500여명이 만세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때 사립 의명학교 직원생도 다수와 같은 학교 직원급 생도 1명이 포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자료는 3·1운동이 전개되던 당시에 재림교회 역시 각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음을 시사해준다.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시대의 사료들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토대로 3·1운동에서 재림교회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실증적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특별히 이 연구에서 가장 주목할 수 있는 것은 3·1운동이 한창 전개되던 당시에 일제에 의해 정리된 자료에 나타난 형사피고된 3인의 재림교인이 누구이며, 어떻게 이 운동에 적극 가담했는지와 관련된 것이다.
■ 3·1운동으로 인해 형사피고된 3인의 안식교인들
역사적 기록에서 3·1운동과 재림교회의 관련성을 찾을 수 있는 핵심자료는 3·1운동 적극 가담자들에 대한 종교별 분류 기록에서 나타난다. 3·1운동이 발발한 지 3개월이 지난 후 <매일신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게재된다.
“3.1運動 발생 이래 전국 감옥에 입감된 수는 오늘 현재 9,059인으로 그 중 종교신자는 3,573인이며, 종교별 인원수는 천도교도 1,360인, 천리교도 10인, 시천교도 5인 ,대종교 4인,유교도 55인, 선종파교도 65인, 정통 종파교도 1인, 불교도 40인, 천주교도 53인, 구세군 10인, 성공회파교도 4인, 장로교도 1,440인, 안식교도 3인, 조합교파교도 7인, 기타 종파미상 77인이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조선총독부는 소요사태로 규정하고 적극가담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조선총독부는 3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3·1운동 가담자 중에 기소되거나 투옥된 사람들의 통계를 종교별, 직업별 등으로 세분화해서 정리해 놓았는데 그 자료에 따르면 3·1운동에 적극 가담했던 재림교인(안식교인)은 총 4명으로 나타난다. 재림교회와 3·1운동의 역사적 연구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우선, 다른 종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인 3명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천도교나 불교와 같은 대중 교도들의 참여 숫자에 비해 재림교회의 3명은 너무 적은 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온 신생 종파들의 규모와 3·1운동에 대한 적극가담자의 숫자를 비교해 볼 때 무시할만한 숫자는 아니다. 기독교 교파 중에서 장로교(1,440명)와 감리교(438명)를 제외한 나머지 교파들과 재림교회의 역사와 규모를 비교해 볼 때 그 숫자는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것이다.
1890년에 선교를 시작한 성공회는 1920년경에 교인수가 3,863명에 이르렀는데, 3·1운동 당시 적극가담자로 형사피고된 경우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비해 재림교(안식교)의 경우 3명으로 교인수 대비 0.15%이다. 장로교와 감리교의 경우 교인수 대비 3.1운동 적극가담자가 0.7%를 상회하고 있는데 비해서 재림교회를 포함한 군소 교단들의 입감 비율은 낮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적은 교세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독립운동에 기꺼이 동참한 재림교인들의 역사적 의의를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3·1운동 적극가담자로서 형사피고인의 신분으로 고통을 당한이 3명의 재림교인들은 누구였을까? 우리는 일제 강점기의 역사적 자료들을 토대로 이 3인 중에 강영국과 홍종엽이 포함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강영국(姜榮國)은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던 1919년 3월 10일경에 김사구와 더불어 이 운동에 뜻을 모은 후, 한 달 후인 4월 10일에 충청남도 보령군 청소면 성연리에 있던 신태종의 집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던 중 체포돼 공주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최종 판결을 대정 8년(1919년) 6월 4일 경성 복심법원 형사부 재판장 조선총독부 판사 총원우 대량으로 되어 있다.
강영국의 죄명은 보완법 위반이었으며, “용못과 진당산에서 횃불시위를 가진 후 주포주재소를 습격하려다가 체포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당시 강영국은 동면(同面)에 속한 정전리에서 영명학원(1915~1925)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집에서 안식일교회 예배소를 개설하여 소장직을 맡고 있었다.
정전리 안식일교회는 “1923년 광천교회 전도부인 이숙자 씨로부터 전도를 받은 이정규 씨가 토대가 되어 출발했는데”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1917년부터 강영국의 집에서 예배소가 시작되었고, 그가 예배소장을 맡고 있던 기록들에 의거해 교회의 시작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재림교회 예배소의 소장으로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투옥된 그의 애국 활동은 사후 47년이 지난 1993년에 대통령 표창에 추서되었다.
홍종엽(洪鐘燁)은 용인(龍仁)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윌 28일에 그는 형 홍종욱과 함께 권종목으로부터 태극기를 전달 받고 200여명으로 구성된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김량장리까지 만세시위 행진을 이끌다가 체포되었다. 판결문에 따르면 홍종욱, 홍종엽 형제는 보완법 제7조에 따라 10개월의 징역형을 받고 수감되었는데, 피고의 신원을 홍족운은 장로교, 홍종엽은 안식교로 되어 있다.
당시 21세의 홍종엽이 다니던 용인의 안식일교회는 마평리에 있던 예배소였다. 1915년 4월에 민영선의 집에서 시작된 마평리예배소는 송기영 귄서인의 지도 아래 정착하여, 3·1운동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인 1919년 1월 3일에 교회를 조직하였다. 용인군 포곡면 금어리에 살고 있던 홍종엽은 이 시기에 전도를 받고 재림교인이 되었을 것이며, 3·1운동 발발 후 용인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안식교인중 하나에 이름을 올렸다.
■ 3·1운동과 관련된 재림교인들
강영국, 홍종엽과 더불어 재림교회 신자로서 3·1운동에 직접 참여했지만, 당시에 검거되지 않아 통계에 잡히지 않은 인물로는 최경선(崔景善)이 있다. 그는 칠골 안식일교회의 창시자인 최정식 장로의 장남으로 재림교회 교육기관인 진명소학교(평남 윤북리)를 나와 1917년에 의명학교(순안)를 5회로 졸업한 재림교회 청년이었다.
최경선은 1919년 3윌 2일 거촌 안식일교회에서 5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본격적인 만세운동을 계획했으나 엄중한 단속에 막혀 독립운동 추진이 요원해지자 5월 상해로 가서 6월에 대한독립청년단에 입단하고, 8월부터 임시정부 재무총장 최재형의 지시로 평양에서 독립운동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1920년 4월 14일에 강계경찰서에 검거된다.
이 기록을 통해서 최경선은 비록 독립자금 모집 활동으로 검거되었지만, 그의 기록에는 3·1운동 참여가 분명하게 적시되고 있어 재림교인으로서 3·1운동에 참여한 역사적 기록으로 고증할 수 있다.
이 외에 3·1운동 당시에는 재림교인이 아니었지만, 이후 재림교인이 된 관련 인물로는 김정규, 정재용 등이 있다. 김정규는 1934년에 조양천교회에 입교하여 안식일교인이 된 인물로 1919년 3월 20일에 황병길이 주도했던 간도 독립만세운동을 이어서 독립시위운동을 이끌었다.
정재용은 3·1운동이 발발하던 당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로, 아들인 정사영 박사가 부산위생병원에서 일하던 1952년에 침례를 받고, 재림교회로 개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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