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평화의 길, DOSS road’를 가다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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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19.04.08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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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핵소 고지’ ... 삶과 죽음 교차했을 전장엔 스산한 바람만
기대보다 좀 늦었다. 재작년 영화가 개봉하기 전, 와보고 싶었던 게 솔직한 욕심이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차일피일 미뤄야 했다. 때마침 남형우 목사가 동경한인교회로 임지를 옮기며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마지막 비행기티켓을 끊고 부랴부랴 달려왔다. 기자가 출국한 다음날, 남 목사 가족도 오키나와를 떠나 도쿄로 향했다.
핵소 고지는 나하교회에서 자동차로 20분이면 넉넉히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일본어로는 지역명을 따 ‘마에다(Meada) 고지’라 부른다. 지나는 길에 오키나와 삼육초등학교와 삼육병원(Adventist Medical Center)을 볼 수 있어 반갑다.
기자가 핵소 고지를 찾은 날은 우연히도 데스몬드 도스가 미국 앨라배마의 자택에서 숨을 거둔지 꼭 13년이 되는 날이었다. 데스몬드는 2006년 3월 23일 부활의 소망을 안고 잠들었다. 현재 테네시 채터누가에 있는 국립묘소에 안치돼 있다.
고지에 오르기 전, 밑에서 먼저 바라봤다. 푸른 나무가 우거진 낮고 평범한 야산처럼 보였다. 그 앞으로 쭉 뻗은 도로엔 어디론가 향하는 자동차가 쌩쌩 내달렸다. 미군이 함포의 호위를 받으며 진격해왔다는 길이다. 전설적인 용기와 시대를 초월한 데스몬드의 이야기가 이 마을 어딘가에서 펼쳐졌다고 생각하니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고지는 120m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이다. 마치 톱으로 썰어낸 듯 날카로운 바위로 덮여있어 ‘쇠톱 산등성’이라는 뜻의 핵소 고지(Hacksaw ridge)라 이름 붙였다. 데스몬드가 소속된 제77사단은 그 밑에서 야영을 했다. 그들의 임무는 고지를 점령하고, 뒤편에 숨어 있는 일본군을 전멸시키는 것이었다.
부대가 머물던 야영지에서 110m 정도는 지형이 가파르고 거칠지만, 병사들이 기어오르기엔 크게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정상을 향한 마지막 10m는 수직으로 솟아 있고, 제일 꼭대기는 오히려 수직에서 1.5.m 가량 바깥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당시 병사들 사이에서 고지를 점령하기도 전에 다 떨어져 죽을 판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배경이다.
이날은 마침 안식일 오후였다. 문득 데스몬드의 안식일이 떠올랐다.
그는 M중대를 찾아갔다. 침상 끝에 단정하게 개어져 있는 군복이 보였다. 그렇게 그 주일이 시작되었다. 그는 안식일에 교회에 가고 싶었다. 성경 말씀대로 안식일에 사사로운 일을 하거나 오락을 하며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런 삭막한 병영생활에서 과연 안식일을 지킬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는 일이 잘 해결되도록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
“제 이름은 데스몬드 T. 도스입니다. 방금 부대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토요일에 인근에 있는 교회에 갈수 있도록 통행증을 꼭 발급받고 싶습니다” - <핵소 고지의 기적> 중에서
‘창조의 기념일’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는 숱한 조롱과 핍박을 당해야 했다. 심지어 군사재판에 회부돼 강제 전역의 위기 앞에 서기도 했다.
토요일에 교회 가기를 원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정신이상자’라고 손가락질당하고, 군인 신분으로 집총을 거부한다는 이유 때문에 불명예스럽게 제대해야 한다면 차라리 이 모든 편견에 맞서 싸우고 싶었다.
“저를 제대시키려는 유일한 근거는 제가 제칠일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제 종교 때문에 제가 정신이상자로 낙인찍힌다면, 또한 그것을 제가 그대로 인정한다면 저는 부끄러운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그런 제대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 <핵소 고지의 기적> 중에서
전쟁의 한 가운데서 지금 기자가 서 있는 이 자리 어딘가에서, 데스몬드가 안식일을 구별하여 지켰을 걸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먹먹해졌다. 저 언덕 밑 어딘가에서 그는 홀로 찬미하며 전쟁이 끝나길 기도했을 것이다. 한때 그를 비난하고 괴롭혔던 동료 병사들이 그의 안식일 예배가 끝나길 숨죽여 기다렸을 것이다.
고지로 올라가야 할 때가 되었다. 전쟁 중에 모든 것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날은 5월 5일이었고, 토요일이었다. 데스몬드가 아침 일찍 일어나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했다. 버논 대위는 그에게 다가와 부탁했다.
“도스. 오늘 또 핵소 고지에 올라가야 하네. 자네 우리와 함께 올라가 주지 않겠나? 안식일이지만, 알다시피 자네는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위생병이고 우리는 정말 자네가 필요하네”
“네. 올라가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으로 드리던 안식일 예배를 마무리할 시간은 가질 수 있겠지요?”
“물론이지. 자네를 기다리겠네”
데스몬드는 토요일 아침에 재림교인이라면 누구나 공부하는 안식일학교 교과를 전쟁터에서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주의 주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관한 연구였다. 그는 교과공부를 마치고 머리를 숙여 기도했다. - <핵소 고지의 기적> 중에서
곧 남형우 목사와 함께 고지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스산한 공동묘지와 민가를 지나니 남산길을 연상시키는 한적한 도로가 나왔다. 그 길을 따라 얼마간 오르면 주차장이 나온다. 사실 이곳은 약 900년 전 류큐왕국 초기 왕의 무덤이 있는 자리다. 지금도 성터와 함께 복원된 문화재가 그대로 남아 있다.
핵소 고지는 미군에게 있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요지였다. 반면 일본군에게는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여기서 약 20Km 가량 떨어진 곳에 일본군 사령부가 있었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깝다. 일본으로서는 마에다 고지가 무너지면 사령부가 점령당하는 것이었기에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극렬 저항했다. 미군은 사방에서 일본군의 숨통을 조였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미군은 오키나와에 무혈 상륙했지만, 이곳을 돌파하는데 50일이나 걸렸다.
실제로 올라 본 핵소 고지는 생각보다 그리 넓지 않았다. 다만 밑에서는 그리 높아 보이지 않던 절벽이 위에서 바라보니 꽤 아찔했다. 뒤편으로는 가파른 경사가 져 있었다. 이 ‘좁은’ 곳에서 그토록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게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수 Km 떨어진 바닷가의 선상에서 함포를 쏘면 무시무시한 포탄이 이 멀리까지 날아와 불바다를 만들었다.
그때 데스몬드가 중위에게 다가가서 기도를 제안하였다.
“중위님, 우리는 전투를 앞두고 있습니다. 생명을 보호하는 데는 기도가 최선이라고 믿습니다. 병사들은 각자 올라가기 전에 꼭 기도를 해야 합니다”
“제군들, 이곳으로 집합!. 데스몬드 도스가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고 싶어 한다네”
고른토 중위가 기도하자고 말했을 때, 어느 누구도 불평하는 이가 없었다. 모두 데스몬드 곁으로 다가와 둥글게 모여 섰다.
지금까지 종교적 신념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던가! 또 얼마나 왕따를 많이 당했던가!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의 부대원들은 그가 기도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몸을 사리지 않고 헌신하는 그를 보고 있었다. 부대원들의 마음은 이미 열려 있었고, 그의 기도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 <핵소 고지의 기적> 중에서
‘깊게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저 아름드리 나무는 그날의 포연을 기억하고 있을까’ ‘저 회색빛 바위는 데스몬드를 알고 있을까’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생각이 복잡하게 뇌리를 스쳤다. 죽음을 각오한 치열한 결전을 벌였을 자리엔 정적만 감돌았다. 70여 년 전, 미군과 일본군이 생명을 걸고 싸웠을 현장엔 산새 소리가 울렸다.
총알과 포탄이 빗발쳤을 구릉지엔 푸른 잔디가 융단처럼 깔려있었다.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를 바람이 한바탕 거칠게 휘몰아치고 지났다. 한가로이 산책로를 오가는 주민들의 모습에서 전쟁의 상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누가 이곳이 핵소 고지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도 모를 듯했다.
그러나 그곳엔 여전히 전쟁이 남긴 흔적이 있다. 특히 일본군이 매복해 있던 지하진지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방어선을 구축한 일본 32군 부대는 미군의 본토 상륙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기 위해 지구전을 폈고, 가카즈 고지에서 이곳까지 지하에 미로 같은 은신처를 파 놓고 숨어 있었다. 그곳은 누군가에겐 삶을, 누군가에겐 죽음의 교차로가 되었을 것이다.
이 어둡고 음습한 동굴에서 부상당한 일본군을 치료하던 데스몬드의 모습이 연상됐다. 아무리 비폭력주의자라 해도 전시상황에서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적군을 살려준다는 건 꽤 충격적이었다. 지금은 폐쇄돼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된 이곳에는 누군가 전쟁에 희생된 이들을 기리기 위해 걸어놓은 빛바랜 종이학이 쓸쓸하게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1945년 4월 29일. 저 가파른 마에다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실제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병사들은 데스몬드가 쳐 놓은 그물을 사다리 삼아 고지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적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이미 미군이 알지 못하는 곳에 참호와 은신처들을 파 놓고 숨어 있었다. 자연의 일부로 보이는 곳곳마다 일본군의 감춰진 총구가 절벽에 오른 미군들을 겨누고 있었다. 사실 오키나와는 공격자에게는 가장 힘든 지형을, 방어자에게는 가장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였다. - <핵소 고지의 기적> 중에서
고지 정상엔 우라소에시가 세운 팻말이 꽂혀있다. 1995년 제2차 세계대전 승전 50주년 기념식 참석차 오키나와를 방문했을 때, 데스몬드의 증언을 기초로 그가 타고 올랐던 절벽의 위치를 표시해 놓은 것이다.
‘위생병 데스몬드 도스 일병은 자신의 종교에 기초한 양심적병역거부자였으며, 전쟁 중에도 집총을 거부했다. 절벽 꼭대기로 올라간 미군 부대는 퇴각하던 일본군의 저항으로 많은 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데스몬드는 일본군의 맹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75명의 부상자를 홀로 구출해 훗날 명예훈장을 받았다’는 내용이 소개돼 있다.
절벽 끝에 발을 대고 서니 ‘주여, 한 사람만 더! 한 사람만 더!’라며 울부짖었을 데스몬드의 간절한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그의 정신이 지금도 어디선가 생생하게 살아 숨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고지가 어쩌면 그에겐 세상의 끝처럼 처절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는 홀로 5시간 동안 부상자들을 구출했다. 그날 B중대에서는 모두 155명이 고지에 올랐다. 그러나 그 중 55명만 제 발로 내려왔다. 100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거짓말처럼 아무도 전사하지 않았다. 데스몬드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병사들은 비록 부상으로 피범벅이 됐지만, 죽다가 살았다는 기쁨에 감사했다.
중대장은 데스몬드가 모두 100명을 구한 것으로 상부에 보고하려 했다. 하지만 도스는 그건 불가능하다며 50명 남짓 될 거라고 겸손해했다. 결국 그들은 그 중간치인 75명으로 타협했다. 훗날 데스몬드가 받은 명예훈장에 75명이 적히게 된 배경이 바로 이것이다. 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대신 총 없이 사람을 살리겠다는 그의 신념은 기적을 불러일으켰다.
“후퇴! 후퇴!”
쏟아지는 적군의 포화와 빗발치는 총탄은 미군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결국 병사들은 사방으로 도망쳤다. 대열을 갖춰 후퇴할 수가 없었다. 데스몬드는 고지 꼭대기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부상병들을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남겨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그들 중 많은 이가 가족이 있을 것이다.
‘나도 가족이 있는데, 나도 아내가 있는데..’
데스몬드는 가까이에 있는 환자부터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 병사는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고지의 가장자리까지 끌고 갔으나, 막상 부상병을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마침 보급품을 끌어올리던 들것과 밧줄이 있었다. 그는 부상병을 굴려 들것에 올리고 할 수 있는 한 단단히 붙들어 매었다. 그러고는 부상병을 밧줄에 매달아서 내렸다.
“저길 봐! 도대체 무슨 일이지?”
후퇴한 병사들은 절벽에서 들것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고지에서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옭매듭을 기억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었다. 그는 재빨리 매듭을 묶어서 부상병의 다리에 두 고리를 넣었다. 그러고 나서 밧줄을 두 겹으로 해서 부상병의 가슴에 둘러 묶었다. 언덕 위에 전에 보지 못했던 나무 그루터기가 눈에 띄었다. 데스몬드는 밧줄을 그루터기에 돌려 매고 천천히 부상병을 내려 보냈다. 그는 쉬지 않고 기도했다.
“오, 주님.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한 사람만 더...” - <핵소 고지의 기적> 중에서
남 목사와 코메자 목사의 말대로 현장에는 탐방객들의 발길이 심심찮게 이어졌다. 미군가족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가이드를 따라 산길을 올랐다. 지긋한 나이의 한 아버지는 20대 아들의 손을 잡고 이곳을 찾았다.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들이 개인적으로, 그룹 단위로 방문했다. 가이드들은 당시의 격전과 데스몬드의 헌신적 희생에 대해 설명했다.
미국 워싱턴에서 왔다는 대딘 빈치 씨와 안토니나 씨는 “영화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평소 오키나와에 여행을 오면 꼭 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직접 오게 됐다. 보는 것만으로도 매우 흥분되는 장소다. 데스몬드가 재림교인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의 고귀한 신념을 느낄 수 있다. 데스몬드의 비무장 스토리는 매우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진촬영에도 흔쾌히 응했다.
하산하는 길에도 계속해서 고지에 오르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이 반드시 이수해야 할 약속된 코스이든, 단순한 궁금증이나 흥미이든 누구라도 이곳에 들르면 데스몬드의 생명존중과 평화의 정신에 대해 한번쯤은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도스는 죽어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평화를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데스몬드는 자라면서 그가 좋아했던 넬 선생님처럼 어딘가 먼 나라에 선교사로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 기억났다. 군함을 타고 갈 때는 몰랐지만 그는 미군에 입대하여 오키나와에 선교사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동료들뿐 아니라 섬의 원주민들도 돌보게 되었다. 문자 그대로 생명을 살리는 선교사가 되었고, 타의 모범이 되는 용감한 사명을 완수하게 된 것이다. - <핵소 고지의 기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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