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연수원의 모태 ‘평신도교육원’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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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서른 번째 ‘생일’을 맞은 재림연수원의 공식 연혁은 1992년 3월 연수원 건립 추진위원회 구성 결의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 이전의 감춰진 ‘비공식’ 역사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그동안 자세히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지난달 29일 열린 재림연수원 30주년 감사예배에서 삼육식품 전광진 사장은 축사를 통해 역사의 한 토막을 꺼내 들려줬다. 그는 동중한합회에서 목회했던 고 전병윤 목사의 아들. 초대 원장이었던 엄기웅 목사와 함께 현재의 대지를 구입하고, 초석을 다지는데 공헌한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재림연수원의 숨은 역사를 전광진 사장만큼 자세히 알고 있는 이도 드물다”고 말한다. 전 사장이 밝힌 ‘히스토리의 스토리’는 이렇다.
1979년 동중한대회(현 동중한합회 / 대회장 엄기웅)는 경기도 광주군 광암리 소재 동성고등공민학교 내에 평신도교육원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에 전병윤 목사를 선임했다.
평신도 가운데 목회를 하고 싶지만, 여러 사정으로 정식 목회를 할 수 없는 이들이 일정 기간 소정의 교육과정을 수료하면 목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자격을 부여하는 기관이었다. 일종의 자급사역자 양성을 위한 교육원이었던 셈이다.
전병윤 목사는 일찍이 이런 시설의 필요를 느껴 가나안농군학교를 운영하던 김용기 장로를 자주 찾아가 대화를 나누며 교육과정 및 노작활동 등 관련 프로그램을 문의하고 배웠다. 월간지 <농군학교> 등 각종 자료도 꼼꼼히 챙겨 틈날 때마다 공부했다.
▲ 재림연수원 초대 원장 엄기웅 목사(좌)와 그를 도운 전병윤 목사
고맙게도 취지에 공감한 동성학교 이사장 이재현 여사와 남편 오정섭 회장이 평신도교육원을 할 수 있도록 학교 일부 공간을 흔쾌히 내어줬다. 이내 교정은 학생과 교육원생으로 활기에 넘쳤다. 캠퍼스와 예배당은 날마다 복작거리는 학생들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재현 여사는 경기여고와 경성여자사범학교(훗날 서울대 사범대로 통합)를 졸업한 당대 한국 재림교회 최고의 엘리트 여성 중 한 명이었다. 단아하면서도 검소했던 그는 치마저고리에 허리띠를 부여 매고 호미나 전정 칼로 교정 이곳저곳을 손수 가꿨다. 지금도 동성학교 어딘가에는 그의 애정어린 손때가 진하게 묻어 있을 것만 같다.
남편 오정섭 회장은 우리나라 공업 기술 분야의 개척자였다. 독일 현지에서 배우고 익힌 선진 기술로 오늘날 대한민국이 기술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초를 놓았다.
이들 부부가 교육원, 강의실, 기숙사, 식당 그리고 전병윤 목사 가족이 거주할 수 있는 사택을 무상으로 제공함으로써 평신도교육원은 개원할 수 있었다.
교육기간은 1년이었다. 모집요강이 발표되자 전국에서 많은 지원자가 모였다. 조대연 교수, 한상경 교수, 김상도 목사, 김진영 목사 등 내로라하는 교수진이 강의를 맡았다. 교내에 과수원과 넓은 밭이 있어 노작교육도 할 수 있었다. 노작은 매우 중요한 교육과정 중 하나였다. 자급사역의 기본이기도 했다. 대개 한 기수에 10명 정도 수료했는데, 이후 삼육대 신학과에 진학해 정식 목회자가 된 졸업생도 여럿이다. 이들은 지금도 전국에서 목회자와 봉사자로 신실하게 교회를 섬기고 있다.
그러나 동성학교에서의 평신도교육원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3년여를 지속하다 계속 운영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엄기웅 대회장과 전병윤 목사는 새로운 터전을 알아보기로 했다. 강원도와 경기도 등 여러 곳을 다니며 알맞은 부지를 물색했다.
이때, 천호동교회에 출석하던 안성수 집사 부부가 팔을 걷고 나섰다. 이들은 마치 자기 일처럼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아낌없는 도움을 줬다. 상당한 금액도 후원했다. 소식을 들은 원주중앙교회 교우들도 헌금으로 힘을 실었다. 전 목사가 1970년대 초 원주 평원동교회에서 시무했던 인연으로 이 지역 성도들이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재림연수원 부지는 이런 정성이 모여 마련됐다. 평신도교육원 이전 문제도 서서히 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원장 사택을 지었다. 현재 연수원 건너편에 있는 세모지붕 단독주택이다.
이 과정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인물이 있다. 비어있는 땅을 지키고, 빈터에서 옥수수 농사를 짓고, 사택 건축공사로 비지땀을 흘리며 헌신한 임영두 장로다. 요즘 제주 모슬포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그는 올 2월까지 문서전도를 하다 은퇴했다. 임 장로는 교육원 아랫동네 어느 이웃이 내어준 빈방에 홀로 머물며 숙식을 해결하고, 건물을 지었다.
전광진 사장은 “아버지와 끝까지 의리를 지키셨던 착하디 착한 형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며 각별한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연수원 이전은 지체됐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오랫동안 진척되지 않은 채 방치됐다. 전 사장은 “그 원인이나 이후 과정은 내가 잘 알지 못한다”고 했다.
전병윤 목사는 1993년 69세의 일기로 주 안에서 잠들었다. 그토록 애썼던 재림연수원이 문을 열기 꼭 1년 전이었다. 그래서인지 전광진 사장은 이 동산에 올라올 때마다 아버지가 더욱 생각나고 그리워진다.
당시만 해도 평사원이었던 그는 개원 첫해 교육행정자 및 기관 임원진과 함께 5기 연수생으로 입소했다. 지금도 새벽설교 제단에서 십자가의 사랑에 대해 절절하게 권면하던 엄기웅 목사가 떠오르고, 눈물로 호소하던 홍광의 목사의 모습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침묵의 시간, 동기생들과 함께 시(詩)를 지어 책자로 편집하기도 했다. 얼마나 감동이 컸던지, 아니면 그날의 은혜와 서사를 잊지 않으려는 듯 아직도 당시 기록했던 설교노트와 명찰, 수료증 등을 ‘기록물’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전 사장은 “그 시간의 생생한 마음과 성령의 임재가 고스란히 여기에 남아 있다”며 노트의 한 페이지를 펼쳤다.
전광진 사장은 “그때의 순수하고 뜨거웠던 믿음의 불길이 이 순간에도 활활 타오르고 있음을 느낀다. 앞으로도 더 많은 기도와 헌신이 재림의 그날까지 이곳을 수호해 주시리라 믿는다”면서 재림연수원이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향후에도 말씀과 기도를 수호하는 진리의 ‘최전방’이 되길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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