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성산 피난교회를 되찾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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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네 살이다. 피난교회의 ‘나이’ 말이다. 사람들이 주민등록증으로 나이를 알 수 있는 것처럼, 피난교회는 정부의 사용승인일자로 연대를 알 수 있다. 참으로 오래된 모습이었다. 쌓아 올린 돌의 구석구석에는 때도 묻고 이끼도 끼고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강산이 일곱 번도 더 변했을 시간이니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피난교회가 태어났던 1951년 즈음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주변 거리는 천지개벽했다. 근사한 호텔도 들어섰고, 오래된 건물은 리모델링을 거쳐 소위 말하는 ‘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하지만 피난교회만이 사진 속 모습과 똑같은 자태로 서 있다. 새로 울타리가 생겼고, 간판도 달렸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돌 하나도 바뀐 것 없이 똑같다.
바뀐 것이 있다면 사람뿐이다. 기자가 들고 있는 사진 속에는 60명이 넘는 사람이 피난교회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사진 속 인물 중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성경도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시 90:10)이라고 했으니 더욱 그러하다. 교회의 증인인 한공숙 장로와 부복수 집사가 아흔이 넘은 고령에도 당시를 또렷하게 증언할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더구나 기억이 조금도 흐려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건강을 믿고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다. 피난교회를 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해 서둘러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자가 한 장로와 부 집사를 인터뷰하고 아울러 마을주민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 놓았지만, 문화재위원들은 위원회에서 파견한 조사관들의 보고를 우선시할 가능성이 크다. 기자는 결국 재림교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위원회의 조사만큼 객관성을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피난교회의 문화재 등록은 하루라도 일찍 추진하는 것이 승인 가능성을 높이는 길일 수밖에 없다.
하늘은 유독 잔뜩 흐리고 금세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혹시라도 오래된 사진이 습기에 들러붙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취재가방 속 제습제를 확인했다. 기자는 고향집이 태풍에 침수되며 사진첩 속 수많은 사진을 그냥 버려야 했던 아픈 기억이 있다. 그로 인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추억할 사진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때문에 사진이 없다면 과거를 증명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몸소 알고 있다. 기자에게 이런 사진은 보물이나 다름없다. 이 사진이 피난교회를 문화재로 등록하는데 어떤 역할을 할지 기대하면서 조심스레 봉투에 담아넣었다.
세계유산본부에 이제까지 취재하고 모은 자료를 확인하려고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업무시간은 오전 9시부터인데 아직 15분은 더 기다려야 했다. 생각보다 날씨가 쌀쌀했다. 시계바늘이 9시15분을 가리킬 때쯤 연락처 목록에서 주무관의 번호를 찾았다. 오늘은 곧장 전화를 받았다.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 이제까지의 취재과정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문화재위원들의 생각을 알 수는 없지만, 실무자의 입장에서는 문화재 등록을 추진하기 위한 충분한 준비가 된 것 같다며, 언제쯤 신청할지 기자에게 물었다. 아직 잘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주무관도 될 수 있으면 빨리 신청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계획이 확실해지면 연락을 달라며 전화를 끊었다.
언제쯤 계획이 확실해질 수 있을까. 적어도 기자의 눈에는 문화재 등록 신청만 하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계획을 아직은 구체적으로 세울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일각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우리가 기념해야 할 것은 피난교회를 통해 이뤄진 복음화와 그 결실로 남아 있는 성도들이라는 말이다. 기자도 이 말에 동의한다. 삼육대 신학과 오만규 전 교수 역시 <한국 재림교회 100년사>에서 “2년에 걸친 제주도 피난생활의 열매는 다른 무엇보다 성산포 일대에서 얻은 소수의 영혼일 것”이라며 피난민들이 육지로 돌아간 후에도 그들이 교회를 지키는 주춧돌이 됐음을 기록하고 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 근처의 카페를 찾았다. 따뜻한 차 한 잔을 주문하고 테이블에 앉아 인터뷰 내용을 정리했다. 하지만 머릿속이 복잡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복음이고 사람이라면 피난교회의 문화재 등록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창은 금방 빗방울로 가득 덮였고 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어폰에서는 부복수 집사의 인터뷰 내용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지난해 9월 제주대회 창립총회와 이를 기념해 마련했던 연합예배의 광경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당시 부복수 집사는 ‘재림신앙 회고와 재림을 고대하며’라는 제목으로 제주 성도들에게 간증을 들려줬다. 현장의 많은 성도가 부 집사의 이야기에 눈물을 훔쳤다. 특히 재림교회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과 학생, 어린이들에게 그의 간증은 단순히 감동을 넘어 재림신앙의 모본이자 역사로 다가갔다.
하지만 한국 재림교회의 가장 힘들었던 시절을 몸소 겪고 그 이야기를 들려줄 어른들의 시대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이는 피난교회의 문화재 등록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일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생활을 증언할 이들이 모두 사라진 후에도 피난교회가 보존된다면 그때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제주대회가 설립됐다. 1951년 피난교회가 세워지고 73년 만의 일이다. 성산을 중심으로 제주 복음화가 이뤄질 당시 제주의 성도는 수십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은 1200명이 넘는 성도가 세 천사의 기별을 전하고 있다. 분명 복음의 결실은 이들일 것이다. 하지만 피난교회도 지난 세월 동안 변하지 않고 묵묵히 제자리를 지켰다. 비록 지금은 재림교인이 아닌 이의 손에서 식당으로 쓰이고 있지만, 피난교회는 분명 제주 복음화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적지이자 문화재인 것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는 미국 속담이 있다. 잊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눈으로 보는 것만한 방법이 없다. 피난교회를 문화재로 등록하고 보존하는 것은 한국전쟁이라는 소용돌이 가운데서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오히려 제주 복음화를 이루신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어느새 주룩주룩 내리던 비가 그쳤다.
* 이 기사는 삼육대학교와 삼육서울병원의 지원으로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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