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평화의 길, DOSS road’를 가다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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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19.04.14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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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코스, 전쟁의 상흔에서 마주한 평화의 소중함
나하 시내에는 아직도 당시의 전적지가 몇몇 보존돼 있다. (구)해군사령부 참호도 그 중 하나다. 나하교회에서 자동차로 15분 남짓이면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깝다. 거리상으로는 약 6Km 정도 떨어져 있다. 나하공항에서도 그리 멀지 않다.
이곳은 1944년 일본해군 야영대에 의해 파여진 사령부호(壕)로 당시에는 450m 길이였다. 전후 한동안 방치돼 있었지만, 1970년에 300m를 복원해 일반에 개방했다.
이곳이 사령부 참호로 선택된 까닭은 해군의 오루쿠비행장(현재의 나하공항)에서 가까운데다 높은 언덕으로 되어 있어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최적의 위치였기 때문이다. 전투에 돌입할 경우 육안으로도 적과 아군 전체를 식별하기 쉽고, 주변에 별다른 시설물이 없어 통신면에서도 장해가 없었다.
또한 미군의 함포사격에도 견뎌내고, 지구전을 지속할 수 있어 일본군으로서는 여러 가지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미군의 공격이 거세지자, 결국 당시 사령관이었던 오타 미노루를 비롯한 간부 6명이 1945년 6월 13일 밤 이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미군의 맹공에 일본군은 민간인까지 전투에 동원했는데, 이 ‘좁은’ 곳에서 약 4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수차례에 걸친 유골수습을 통해 약 2400구의 시신이 발견됐다고 한다.
참호로 들어가는 로비에는 사진과 연대표 등 관련 자료가 마련돼 있다. 전시관에서는 무기와 전투복 등을 볼 수 있다. 입장권을 끊고 입구에 들어서면 곧바로 계단이 나온다. 지하에 굴을 파 미로처럼 연결시켜 놓았다. 30m 정도의 계단을 내려가면 통로가 종횡으로 뻗어 있는 호 안으로 이어진다.
막료실, 의료실, 암호실, 하사관실 등의 시설이 눈에 띈다. 유물은 거의 없고, 비어있다. 당시 그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그림으로 설명해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는다. 성인 한두 사람이 겨우 지날만한 좁은 통로를 걷다보면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작전실 옆에는 사령관실이 있다. 오타 미노루가 이 방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릴 때 사용했던 수류탄 파편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벽면에는 ‘일황의 깃발아래 죽는 것이야말로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는 것’이라는 글귀가 남아 있다. 오타 미노루가 즐겨 부르던 군가의 가사라고 한다. 한 일본인가족이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둡고 축축한 참호는 마치 세상과 단절된 듯 인터넷이 되지 않았다. 더 답답하게 느껴졌다. 통로를 따라 밖으로 나서자 그제야 와이파이가 터졌다. 죄의 땅굴로부터 벗어난 해방감 같은 게 느껴졌다.
잠시 전망대의 의자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평화를 위해 얼마나 노력, 아니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생각했다. 세상에 평화의 사도로 보낸바 된 우리에게 평화는 얼마나 체감적인 단어인지 떠올렸다. 훗날, 신앙의 후손들이 ‘한반도 평화의 시대’ 그때 한국 재림교회와 성도들은 무얼 했냐고 묻는다면 우린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자문해 봤다. 멀리 동중국해가 눈에 들어왔다.
■ 폐허로 남은 일본군 제32군 사령부 지하호
이곳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제32군 사령부호(壕)가 있다. 류큐왕국의 왕이 살던 곳으로 유명한 슈리성 바로 앞이다. 1944년 3월, 일본군은 오키나와 남서의 여러 섬을 방위할 목적으로 제32군을 만들었다. 이 호(壕)는 그때 구축한 것이다. 이를 위해 많은 지역주민이 동원됐다.
이듬해 3월, 일본군 제32군 사령부는 지하호로 이동하여 미군과의 결전을 준비했다. 호는 5개의 갱도로 이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갱구가 막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호 내에서는 총원 1000여명의 군사와 오키나와 출신 군속, 학도병 등이 함께 생활했다. 전투 지휘에 필요한 시설과 설비가 완비됐고, 통로 양쪽에는 병사들이 사용하는 2단, 3단의 침대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1945년 5월 22일, 일본군 사령부는 오키나와 본섬 남부의 마부니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본토 결전을 늦추기 위한 지구작전을 펴기 위해서였다. 5월 27일 밤에 본격적인 철수가 시작됐고, 사령부호의 주요 부분과 갱구는 파괴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령부의 철수에 따른 군인과 주민들이 혼재한 도피행렬에 뒤섞이며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미군은 일본군 사령부로 사용했던 이 일대에 사흘 밤낮 동안 쉴 새 없이 폭탄을 투하했고, 결국 5월 31일 미군에 점령됐다.
슈리성을 지나 나하에서 북쪽으로 한참을 올라가다보면 치비치리가마라는 곳이 있다. 일본군들이 은신해 있던 방공호다. 당시 오키나와에 남아있던 일본군 잔군들은 주민들에게 “미군에게 붙잡히면 남자는 탱크로 깔아뭉개고, 여자는 강간한 뒤 잔인하게 죽여버린다”는 헛소문을 낸다.
1945년 4월,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하자 공포에 질린 오키나와 사람들은 이 방공호에 숨어 있다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비극을 겪는다. 아직도 그 안에는 수습되지 못한 유골이 남아 있다고 한다. 유사한 기록은 데스몬드 도스의 책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마침내 4월 20일. 병사들은 오키나와섬에 상륙했다. 부대원들은 참혹한 장면을 목격하고는 경악했다. 많은 원주민 여자가 자녀들의 목을 베고 그들도 자살한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엄마들이 높은 절벽에서 자녀들을 바다에 내던지고 자신들도 뛰어내림으로써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 곳에서 이미 수백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다니!
일본군은 오키나와 원주민들에게 미군이 들어오면 여인네들을 겁탈하고 아이들을 죽이는 등 잔인하게 행동할 것이라고 잔뜩 겁을 주었다. 이 ‘난폭한’ 미군들에게서 벗어나려면 도망치라고 말했다. 수치를 당하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종용했기 때문에 이런 가슴 아픈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어떤 병사는 이 장면을 보고 구역질을 하기도 했다. 전쟁, 이 참혹한 현실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 <핵소 고지의 기적> 중에서
■ ‘Doss road’의 마지막 코스 ...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이번엔 남부지역으로 차를 돌렸다. ‘Doss road’의 마지막 코스인 평화기념공원을 찾아서다. 원자폭탄이 투하된 히로시마 원폭 유적지나 나가사키 원폭공원에 비해 오키나와의 평화기념공원은 사람들에게 덜 알려진 편이다. 오키나와전투로 희생된 이들을 기리기 위해 당시 격전지였던 마부니 언덕에 조성했다.
나하시내에서 20여 Km 떨어진 이곳은 1975년 설립했으며, 2000년 4월 현재의 모습으로 확장 개관했다. 부채꼴 모양으로 형성된 공원에는 오키나와의 역사부터 태평양전쟁의 과정과 결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각종 자료가 전시돼 있다. 전쟁의 참상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모형과 사진, 영상, 유품이 있다. 폭격의 폭풍우가 휩쓴 섬에서 혼비백산하며 정치 없이 떠돌아다니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며 방문객들은 전쟁의 실상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1945년 3월 말, 역사상 보기 드문 격렬한 전쟁의 불꽃이 이 섬을 뒤덮었다. 90일간 계속된 ‘철의 폭풍’은 섬의 지형을 바꾸고, 대부분의 문화유산을 파괴했으며, 20여만 명의 귀중한 목숨을 빼앗아 가버렸다. 오키나와전은 일본에서 유일하게 주민을 총동원한 지상전이며,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최대 규모의 전투였다.
오키나와전의 특징은 무엇보다 민간인 전사자가 군인보다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이다. 그 수는 10수 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포탄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 막다른 곳까지 몰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 기아와 말라리아로 쓰러진 사람, 패주하는 일본 군대에 의해 희생된 사람도 있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극한 상황 속에서 전쟁의 부조리와 잔혹함을 몸소 체험했다. 오키나와의 마음은 인간존엄을 무엇보다 중요시하고, 전쟁으로 이어지는 일체의 행위를 부정하며, 평화를 추구하고, 인간성의 발로인 문화를 각별히 사랑하는 마음이다.
전쟁이 남긴 피비린내 나는 역사적 교훈을 올바르게 다음 세대에 전하며, 전세계 사람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호소함으로써 이를 통해 영원한 평화의 확립에 기여하기 위해 1975년 설립했다.
공원 한쪽에는 당시 강제로 징용돼 희생당한 한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1975년 세운 ‘한국인 위령탑’이 있다. 둥근 봉분 모양으로 쌓은 돌무덤은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서 수집해 옮긴 것이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의 청년들이 일본의 강제 징모로 대륙과 남양 여러 전선에 배치될 적에 이곳에 징병 징용된 사람 1만여 명이 무수한 고초를 겪었던 것만이 아니라 혹은 전사도 하고 혹은 학살도 당하여 아깝게도 희생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 한국인 위령탑 비문 중에서
맞은편 전시관에서는 세월이 흘러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전쟁의 상흔을 마주할 수 있다. 1층은 어린이 전시실, 2층은 테마별로 역사를 체험하는 상설전시실이다. 우리말을 제공하는 음성안내기로 설명을 들을 수 있어 자료들을 좀 더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다.
입구 로비엔 아직도 제거되지 않은 불발탄이 발밑에 그대로 보인다. 강화유리판을 밟고 그 위에 올라서면 정신까지 아찔하다. 미군이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사용한 포탄은 모두 270만 발이 넘는다. 당시 오키나와 주민이 57만 명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1명당 472발의 포탄을 사용한 수치다. 전후 불발탄 처리 실적만도 117만여 발이나 된다.
■ 제1전시실 ... 오키나와전으로 가는 길
이른바 ‘류큐 처분’부터 오키나와전투 직전까지를 시간 순서대로 전시했다. 메이지 정부는 류큐왕부에 대해 무력으로 ‘류큐 처분’을 단행했다. 그에 따라 오키나와현은 황민화 정책으로 급속히 일본화가 진행됐다. 근대화를 서두르던 일본은 부국강병책으로 군비를 확장하고, 주변 국가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만주사변, 중일전쟁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며 평화롭던 섬 오키나와는 15년 전쟁의 최후의 결전장이 되고 말았다.
■ 제2전시실 ... 주민이 본 오키나와전 ‘철의 폭풍’
오키나와전의 실상을 주민의 시점에서 그리고 있다. 피해 상황을 입체적인 지도와 영상, 실물 등으로 전시한다. 오키나와전에서 미군과 일본군은 총력전을 벌였다. 물량작전을 펼친 미군은 무차별적인 공습과 함포사격을 가해 엄청난 수의 포탄을 쏘아댔다. 이 ‘철의 폭풍’은 약 3개월 동안 이어졌다. 참호 등에서 발견된 의료기구와 대형 모니터를 통해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자살특공대가 대거 출현했다는 점이 더욱 가슴 아프게 한다. 별다른 구명장치도 없이 폭탄을 몸에 두른 채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한 소년병의 모습은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목숨을 걸고 미군의 군사시설이나 장비에 돌진해야 했을 어린병사들의 비극이 셀 수 없이 펼쳐졌을 것이다.
■ 제3전시실 ... 주민이 본 오키나와전 ‘지옥의 전쟁터’
오키나와전에서 주민이 겪은 참극을 지하(동굴)와 지상(죽음의 방황)을 통해 상징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일본군은 슈리결전을 피해 남부로 퇴각하고 지구전을 택했다. 이후 미군의 철저한 소탕작전으로 막다른 곳까지 몰렸고, 군인과 민간인이 뒤섞인 비참한 전쟁터가 되었다.
방공호 안에서는 일본군의 주민학살과 기아와 질병 등으로 인한 집단사가 이어졌다. 밖에서는 미군의 박격포, 화염방사기 등에 의한 살육으로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동굴 속으로 피난한 주민의 생활상을 모형으로 꾸몄다.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아기의 입을 틀어막는 어머니와 위협하는 일본군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당시 주민이 입었던 옷가지와 물통 등이 전시돼 있다.
■ 제4전시실 ... 오키나와전의 체험 ‘증언’
당시의 실상을 전하는 물적자료는 매우 적은 편이다. 원통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을 체험한 주민의 증언 밖에 없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에 마음을 닫은 사람들의 무거운 입에서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이어진다. 오키나와 각지, 소개지, 이민 간 나라에서 보내온 전쟁체험의 증언과 영상을 볼 수 있다. 145명(155건)의 증언과 약 1000건의 영상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말해준다.
실상을 전한 한 여성의 증언은 충격적이다.
“언덕은 맹렬한 폭격을 받아 순식간에 바위가 드러났다. 길거리에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썩은 냄새를 진동하는 시체들이 가는 곳마다 가득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엄마의 젖가슴을 빠는 아기, 그것을 보고도 못 본 체하며 지나가는 사람들, 부모를 잃고 누구에게나 따라오는 어린아이들, 셀 수도 없는 비극이 가는 곳마다 기다리고 있었다. 앞바다에 도착한 함선의 스피커에서는 투항을 선전하는 유창한 일본어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 제5전시실 ... 태평양의 요지
전후 수용소 생활, 27년간의 미군 통치와 복귀운동, 평화창조를 추구하는 오키나와를 형상화했다. 전쟁이 끝나자 오키나와는 거대한 수용소가 됐다. 그 후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한 냉전 체제 안에서 군사기지로 강화된다. 토지를 빼앗기고, 숱한 억압을 받아 온 주민들의 분노는 섬 전체의 투쟁과 복귀운동을 확산됐다. 오키나와의 상처는 동서 냉전이 끝난 지금도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있다.
전시관을 빠져나오는 발걸음은 마치 지옥을 빠져나오는 것 같았다. 정신뿐 아니라, 체감으로도 전쟁의 공포가 느껴졌다. 전시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렵고 끔찍했다. 집계에 따르면 오키나와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모두 20만656명(일본 측 18만8136명, 미군 측 1만2520명)에 이른다고 한다.
전시관 건너편에는 오키나와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의 이름을 새긴 ‘평화의 비’라는 위령비가 병풍처럼 줄지어 서 있다. 그 한편에 한국인 전몰자들의 이름이 보였다. 전쟁 당시 1만여 명의 한국청년들이 끌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까지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300여명에 불과하다. 면이 비어있는 곳은 앞으로 추가자들의 이름을 새길 곳이다. 하지만 작업의 속도는 느리고 더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밤에는 시체를 밟지 않기 위해 지팡이를 가지고 걸었다던 한 생존자의 이야기가 계속 귓가에 머물렀다. 깊은 공감이 됐다.
“전쟁처럼 잔인하고 오욕투성이인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생한 체험 앞에서는 어떠한 사람도 긍정하고 미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분명히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전쟁을 용납하지 않는 노력을 할 수 있는 것도 우리들 인간이 아닐까요. 전후 이래 우리는 모든 전쟁을 원망하며 평화로운 섬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이것이 너무나도 큰 대가를 치르고 얻은 확고한 신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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