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평화의 길, DOSS road’를 가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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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19.04.04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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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의 시작 ... 국제교회 앞 데스몬드 헌정 기념비에서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에서 560Km 떨어져 있는 아름다운 섬. 야에야마제도, 미야코제도 등 수많은 부속 도서가 인근에 딸려 있다. 12세기부터 류큐왕국이라는 독립국으로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역사를 이루며 발전했다. 15세기 들어 통일왕조를 건설한 류큐왕국은 한국, 중국, 일본과 적극적인 교류를 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1609년 가고시마 사쓰마국의 침략을 받아 류큐왕국은 붕괴되고, 약 4세기 동안 사쓰마의 지배를 받는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기점으로 일본이 근대국가의 모습을 형성하자 사쓰마가 통치하던 류큐왕국은 자연스럽게 일본 국가체제에 통합되며 500년 왕조시대의 막을 내린다.
오키나와는 그 아름다운 풍광에 비해 전쟁의 쓰라린 아픔을 겪어야 했던 땅이다. 19세기 후반에는 청일전쟁에 주민들이 강제 징병됐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피 비린내 나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9만4000명의 민간인이 희생됐다. 이는 전투에서 사망한 일본군과 미군 사망자를 모두 더한 수준과 비슷한 규모다.
미군에게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 공격을 위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미군에 밀린 일본군에게는 이곳이 최후의 보루였다. 미군은 끈질기게 저항하는 일본군을 향해 무자비한 폭격을 가했다. 함대 1500척을 앞세운 미군은 1945년 3월 26일부터 3개월 간 포탄 217만발을 퍼부었다. 주민 한 사람당 50발이 넘는 양이다. ‘철의 폭풍’(TYPHOON OF STEEL)으로 불리는 이 작전은 섬의 지형까지 바꿔놓았다.
1945년 8월 15일 포츠담선언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일본은 미군의 군정 치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소련과의 냉전 시대에 접어들며 오키나와는 미군의 동북아 군사전략기지로 활용된다. 일본 정부는 주민동의를 거치지 않은 채 미국에 오키나와를 군사적 요충지로 내주었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안보조약으로 국권을 회복한 후에도 계속 미군 정권아래서 통치를 받아야 했다.
끈질긴 복귀운동 끝에 오키나와는 1972년 5월 15일 다시 일본에 귀속되지만, 아직도 섬의 20%가 미군기지로 사용되고 있고, 토지 반환을 요구하는 주민들의 시위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 ‘총 없는 병사’ 데스몬드 도스는 누구?
1919년 2월 7일 미국의 버지니아 주 린치버그에서 목수인 윌리엄 토머스 도스와 구두공장 노동자였던 버사 에드워드 도스 사이에서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주로 버지니아 주 페어뷰 하이츠에서 보냈고, 청년 시절 뉴포트뉴스의 조선소에서 일하다 징병검사를 받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분류되었다.
1942년 4월 1일 버지니아 캠프 리의 신병교육대로 입대했다. 그해 8월 17일 군 생활 중 도로시 슈트와 결혼했다. 자녀는 아들 토머스 하나를 두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5월, 최후의 발악을 하는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한 전투에 투입되었다. 미군은 120m나 되는 바위투성이의 마에다 고지(핵소 고지)를 점령했으나, 일본군의 집중포화를 견디지 못해 후퇴를 거듭했다. 100여명의 부상자들은 그곳에 고립되어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는 도망가지 않고, 홀로 병사들을 고지 아래로 후송시켰다. ‘주여! 제발 한 명만 더 구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은 그는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환자들에게 다가갔다.
그 공로로 미 육군 사병으로는 역사상 처음으로 집총거부자로써 최고 훈장인 국회 명예훈장을 받았다. 20016년 앨라배마 주의 페이몬에 있는 자택에서 부활의 소망을 안고 잠들었으며, 2006년 4월 3일 테네시 주 채터누가의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평소 생명을 죽이는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그의 신념은 전장에서도 꺾이지 않았고, 오히려 꺾을 수 없는 꽃으로 피어났다.
■ 여정의 시작 ... 국제교회 앞 데스몬드 헌정 기념비
‘DOSS road’는 공항에서 약 20분 거리에 위치한 나하교회에서 출발한다. 남형우 목사가 PMM 선교사로 사역한 교회다. 인구 35만 명이 모여 사는 나하시는 오키나와현청이 소재한 중심부다. 시청, 백화점, 호텔, 상점 등이 밀집한 번화가인 국제거리 등 유명 스폿이 몰려 있어 관광객의 발길로 연중 붐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미군의 공중폭격으로 도시의 90% 이상이 파괴됐을 만큼 처참한 격전지였다.
교회에서 20Km가량 떨어진 기타나카구스엔 오키나와대회 선교본부와 주로 주일미군 재림교인과 가족들이 다니는 국제교회가 있다. 그 앞마당에 데스몬드 도스를 기리는 기념비가 두 개 서 있다. 나하 시내에서 자동차로 약 30분이면 닿는 거리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낡은 하얀 비석엔 ‘데스몬드 T. 도스’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있다. 원래 핵소 고지 아래 있던 것이다. 하지만 도시개발로 비석이 건물에 둘러싸여 보이지 않게 되고, 나무와 잡초가 우거져 흉물처럼 방치되자 몇 해 전 이곳으로 옮겨왔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이자 미 육군 제 77보병사단 위생병이었던 데스몬드 도스 일병은 마에다 고지에서 보여준 용기로 인해 국회 명예훈장을 받았다. 도스 일병은 그의 부대가 퇴각한 후에도 계속해서 상부에 홀로 남아 75명의 부상병을 이끌고 절벽의 끝으로 데려갔고, 밧줄을 이용해 환자들을 후송했다’는 기록이 영어와 일본어로 양면에 새겨져 있다. 과거 이곳을 방문했던 데스몬드가 아내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 옆에는 독특한 모양의 녹색바탕 비석이 서 있다. ‘이 센터는 하나님과 그들의 나라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진리의 봉사자에게 헌신하고 있다’는 내용의 국제교회와 군인센터를 소개하고, 데스몬드를 헌정하는 기념비다.
남형우 목사에 따르면 미군들이 오키나와부대에 배속되면 정훈장교의 안내를 받아 이곳을 찾아 데스몬드의 정신과 교훈을 배운다고. 종종 미군 범죄가 일반에 알려지며,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들이 이곳에서 데스몬드의 비무장·비폭력 신념을 일깨우고 고귀한 희생을 기린다면 정신을 한층 새롭게 무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리란 생각이 들었다.
남 목사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건장한 체격의 한 흑인이 건물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국제교회를 맡아 봉사하는 다밈 메상 코메자 목사다. 아프리카 토고 출신이라는 그는 한국에서 왔다는 기자의 인사에 대뜸 2006년 독일월드컵 이야기를 꺼내며 활짝 웃었다.
코메자 목사는 “데스몬드의 비석은 원래 많이 더럽고 지저분했는데, 얼마 전 일본인 성도들과 함께 깨끗이 청소했다. 이것은 그의 숭고한 삶을 기리는 비석이다. 마침 올해가 데스몬드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여서 의미 깊다. 이 비석을 보기 위해 미군이나 가족은 물론, 일본인들도 자주 방문한다. 간혹 여행사이트의 정보를 보고 오는 관광객도 있다. 재림교인과 상관없는 일반인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 역시 남 목사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코메자 목사는 “새로운 부대원이 오면 핵소 고지 등 전적지와 함께 이곳을 견학코스로 방문한다. 과거 오키나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그때 데스몬드라는 인물의 영웅적 헌신이 있었다고 소개하며 정신교육을 한다. 우리는 그가 재림교인이었다는 사실에 특별한 자부심을 느낀다”고 전했다.
말을 섞은 김에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눴다. 그에게 ‘데스몬드의 정신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예상치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어려운 질문”이라며 난감해 했다. 그는 “데스몬드는 재림교인으로서 그리고 군인으로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존중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의 투철한 삶은 생명을 해치지 않는 비폭력 사상을 말해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신이고 사랑”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데스몬드는 자신이 곤경과 위험에 처할 걸 알면서도 신념을 지켰다. 이러한 모습은 비무장·비폭력주의 외에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재림교인들이 어떠한 자세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 훌륭한 모본이 된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실 것을 확신했다. 아니, 혹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주님을 향한 믿음을 꺾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는 하나님께 서원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숱한 시험과 핍박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결국 성공을 거뒀다”고 부연했다.
첫 일정을 시작하며, 외견상으로는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아니 어쩌면 볼품없어 보이는 한 작고 낡은 비석을 앞에 두고 여러 가지 의미를 떠올려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남형우 목사가 비석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아마 그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담대해졌죠. 우리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없고. 하지만 데스몬드와 같은 정신을 갖고 산다면 훨씬 더 가치 있는 신앙인이 될 겁니다. 재림성도들이 ‘내가 만약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과연 어떤 자세를 취할까’라는 생각을 갖고 산다면 한층 성숙한 의식을 가진 크리스천이 되지 않을까요?”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서산마루로 저무는 시간. 국제교회를 나서는 길에 오키나와 재림군인센터에서 처음으로 잠을 잔 인물이 바로 자신이라며 미소 짓는 데스몬드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1995년 3월 데스몬드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50주년을 맞아 오키나와 주둔 미군 사령관 존 맨데빌이 오키나와 참전용사들을 그곳으로 초청하는 편지를 받았다. 데스몬드는 그 편지에 답장을 했고, 자신이 핵소 고지 전투에서 명예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들은 오키나와에서의 첫날 저녁에 오키나와 국제재림교회를 보았다. 데스몬드는 그 교회를 기억했다. 1969년에 오키나와를 방문했을 당시 교회는 본당 옆에 군인들을 위한 시설을 완성했다.
“대위님, 내가 저 군인센터에서 잠을 잔 최초의 인물이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1969년 오키나와의 군인센터를 헌당했을 때 저기서 잘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하도록 허락해 주었지요” - <핵소 고지의 기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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