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생명처럼’ ... 이순옥 할머니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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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19.12.16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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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속에 간장 들이키며 안식일 지켜 ... 후학 위해 성경 기증
대학 졸업 후 황해도의 한 부잣집으로 시집을 갔다. 그의 남편 역시 일본 동경에서 유학한 인텔리였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민족은 분단됐다. 그는 월남하지 않고, 가족과 함께 평양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사상과 이념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그의 집안은 부르주아라며 공산주의자들에게 타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할머니는 분단 이후 북한에서 침례를 받았다. 6.25 동란의 상흔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1957년이었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기독교인은커녕 재림교인이 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던 시대다. 다행히 매우 제한적이나마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남아 있던 때였다.
어느 일요일, 교회에 가려고 집을 나섰는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옆집 할머니가 “예배는 토요일에 드리는 거야. 토요일이 안식일이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젊은 새댁이었던 이순옥은 “세상에 그런 교회가 어디 있느냐”고 되물었다. 할머니는 곧 평양 외곽의 기림리에 가면 알 수 있다고 답했다. 그곳에 산부인과 의사가 한 명 살고 있었는데, 그가 신실한 재림교회 장로였다.
이후 이순옥은 북선대회 서기(현 총무)였던 김겸목 장로에게 성경을 공부하고, 재림기별을 받아들였다. 그해 어느 칠흑같이 어둔 밤 대동강 지류인 보통강변에서 침례를 받았다. 물살이 너무 거세 김겸목 장로 혼자 집례를 하지 못하고, 두 사람이 보조를 해야 했다. 그 중 한명이 원로사학자인 김재신 목사의 할아버지다.
김겸목 장로는 교회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북한을 떠날 때, 성도들을 돌봐야 한다며 홀로 남아 교회를 지키다 반동분자로 몰려 아내와 함께 순교한 인물이다. 안식일마다 벙거지를 쓰고, 소달구지를 몰며 신분을 위장해 지역을 순회하며 예배를 인도했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다. 보관하고 있는 십일조를 내놓으라는 당의 지시를 거부했다가 결국 투옥되어 고문 끝에 숨을 거뒀다.
그즈음 김일성의 종교말살정책은 동토를 더욱 꽁꽁 얼어붙게 했다. 탄압과 핍박의 바람은 휘몰아쳤다. 재림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순옥과 함께 교회에 다니던 30여명의 재림교인이 한날한시에 모두 체포돼 총살을 당하는 끔찍한 참변도 있었다.
사형을 집행하기 전, 내무서원들은 “대체 너희가 믿는 예수가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신앙을 부인하지 않는가”라고 추궁했다. 재림성도들은 죄에 빠진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용감하게 소개했다. 내무서원들은 “그렇다면 너희도 그 예수처럼 죽고 싶은가”라고 위협했다.
만약 예수를 부인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회유했지만, 성도들은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다. 흥분한 내무서원들은 기다란 철사에 30여명 재림성도들의 손을 마치 굴비 엮듯 한꺼번에 찔러 관통시켰다. 그리고는 한자리에서 기관총을 난사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이탈하거나 예수를 부인한 이가 없었다.
한번은 인근에 살던 어느 재림교회 목사 부부가 사형대로 끌려가면서 핏덩이 같은 아들을 그에게 맡긴 일이 있다. 할머니는 그 아이를 친자식처럼 여기고 정성을 다해 키웠다.(* 그러나 그 아들마저 훗날 34살이 되던 1992년 8월 몰래 복음을 전하다 발각되어 반동이라는 이름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그 당시 재림교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이순옥은 처형은 면했지만, 평양이 아닌 함경북도 두만강변까지 강제 이주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이웃들에게 재림기별을 전했다. 마을사람들이 기독신앙을 갖게 될 것을 두려워한 지방 관리들은 그를 다른 마을로 추방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온갖 핍박 속에서도 가는 곳마다 복음을 증거했고, 추방과 이주를 5번이나 거듭해야 했다.
모진 고초에도 할머니는 북한에서 60-70가정에 복음을 전한 것으로 알려진다. 공산 치하에서 소망 없이 죽어가던 이웃들에게 세 천사의 기별을 전했다. 그가 전도한 사람 가운데는 순교당한 이도 있었다. 남편마저 종교인이란 이유로 공개총살을 당했다. 1975년의 일이었다. 그의 사진이 온성사거리에 내걸렸다. 당은 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처형할 수 없으니, 간첩으로 내몰았다.
생전의 이순옥 할머니가 김선만 목사와 나눈 대화에 의하면 많을 때는 50명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할머니는 “나야 하나님 밖에 모르는 사람이니까. 북조선에서도 안식일을 지켰지. 혼자 드릴 때도 있고, 아는 사람을 데려다가 같이 드리기도 하고. 많을 때는 50명이 함께 예배를 드렸어. 그건 목숨 내놓고 하는 거야. 그래도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믿음 때문에 평안한 가운데 예배를 봤어”라고 말했다.
이는 불과 20년 전까지 북한 지하교회에 재림교인이 존재했다는 생존자의 이야기이자, 어쩌면 지금도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갖게 하는 유의미한 증언이다.
실제로 아들 이광일(2016년 작고) 씨는 “우리는 반동분자의 집안이었기 때문에 당에서 직장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사진을 찍어 돈을 벌었는데, 안식일이면 집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사진을 찍는 척 망을 보다 예배가 끝날 즈음이면 돌아가 문을 열어주곤 했다”며 이 같은 증언을 뒷받침했다.
이순옥 할머니는 자신의 한국행을 도왔던 김균 장로에게 “내가 50년간 북조선에서 신앙하면서 안식일을 두 번 못 지켰다. 두 번 모두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이감하던 날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렇다면, 불가능할 것 같은 북한에서 어떻게 안식일을 지켰을까. 그가 안식일을 성수하기 위해 얼마나 무진 애를 썼는지 알 수 있는 몇 가지 일화가 있다.
할머니는 주기적으로 몸이 아팠다. 안식일 노동을 피하기 위해 목요일이나 금요일만 되면 빈속에 간장을 한 사발씩 벌컥벌컥 들이켰기 때문이다. 그러면 고열이 나서 토요일에는 몸져누울 수밖에 없었다. 내무서원이 들이닥쳐 “왜 일을 하지 않느냐”고 추궁하면 “아파서 나갈 수 없다”고 했다. 이마를 만져보면 정말 열이 펄펄 끓었다. 그렇게 매번 안식일을 ‘구별’하니 나중에는 이를 감시하던 내무서원마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눈감아 주었다.
어느 해는 투표가 안식일에 잡혔다. 북한에서는 전원이 투표해 전원이 찬성해야 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투표장에 나가지 않았다. 모든 식구들이 방에 누워 있었다. 화가 나 집안으로 들이닥친 내무서원이 강제로 끌어내려 했지만, 아파서 갈 수 없다며 끝끝내 버텼다. 그는 속으로 ‘하나님! 어서 빨리 해가 저물게 해 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고인의 삶이 우리에게 더 큰 울림을 주는 까닭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긴 까닭이다. 그는 이화여대 재학 시절 특별한 계기로 한 친구를 통해 이름 모를 어느 재림교회 목사가 보던 성경을 받았다. 그것이 재림교회와의 첫 인연이었다. 1936년 발행한 이 낡은 성경에는 지금도 일제강점기 사경회 때 붙였다는 ‘일곱 교회 표상 도표’가 그대로 남아있다.
할머니는 서슬 퍼런 감시의 눈초리에도 목숨을 내놓고 성경을 지켰다. 늘 복대에 숨겨 차고 다녔다. 이웃들이 “요즘 먹을 것도 없는데, 아주머니는 뭘 그렇게 잘 드셔서 몸이 부하나”라고 물을 정도였다. ‘고대사화’라 부르던 <부조와 선지자> <정로의 계단>도 소중하고 조심스럽게 간직했다. 권정행 목사를 중국에서 처음 만났을 때 <정로의 계단> 1장을 줄줄 외울 만큼 말씀을 가까이 했다.
그러나 극적인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전신주 밑의 성경’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반동 집안으로 낙인찍힌 할머니의 집에는 성경을 안전하게 보관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늘 부엌의 찬장 뒤에 감춰두었다. 부엌에서 성경을 보다 바닥에 묻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마을에 살던 동리행정관이 할머니를 찾아와 “아주머니 곧 집안 수색을 할 겁니다. 그러니 숨길 수 있는 게 있으면 숨기십시오”라고 귀띔했다. 평소 사이가 좋았던 그는 이 집에 성경이 있는 걸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찬장 뒤에 감췄던 성경을 냉큼 꺼내 둘째아들에게 건넸다. 아들은 이를 방 앞 기둥에 걸어둔 당시 중학교에 다니던 여동생의 책가방에 깊숙이 넣었다.
이튿날 새벽녘. 느닷없이 내무서원들이 가택조사를 나왔다. 이들은 들어오자마자 부엌으로 들어가 찬장 주변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이미 성경의 위치를 알고 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성경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이상하다. 여기 있을 텐데...”라며 고개를 갸웃했다. 여동생의 책가방을 곁에 둔 채 이들은 한참을 뒤적이다 돌아갔다. 간담을 서늘케 하는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할머니는 성경을 앞마당 전신주 아래로 숨겼다.
언젠가는 삽을 든 일꾼들이 전신주가 낡아 교체해야 한다며 집으로 찾아왔다. 땅을 파헤치면 성경이 발각될 게 뻔했다. 온 식구들은 사색이 됐다. 일꾼들이 잠시 툇마루에 앉아 쉬고 있는 사이, 간절히 기도했다. 성경을 소지하는 것도 불법이지만, 감췄다는 건 더 크고 무거운 죄였다.
가슴을 졸이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들 광일 씨가 낮은 목소리로 “어머니, 큰일 났네요”라며 걱정했다. 그런데 이순옥 할머니는 오히려 “염려하지 말거라. 이제 소나기가 내려 저 사람들 다 집으로 돌아갈 거다”라며 태연했다. 아들은 “어머니, 청천하늘에 갑자기 무슨 소낙비입니까”라며 기가 막혀 했다.
그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치 거짓말처럼 먹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었다. 소나기가 쏟아졌다. 거센 빗줄기는 한동안 그칠 줄 몰랐다. 무심히 하늘을 바라보던 일꾼들은 하는 수 없다며 장비를 챙겨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일이 있은 후 할머니는 뒤뜰에 구덩이를 파 성경을 숨겼다. 그러나 너무 황급히 감추느라 제대로 감싸지 못했다. 비닐을 구하기도 어려운데다 비까지 내려 보관이 힘들었다. 나중에 꺼내보니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의 일부가 떡처럼 달라붙어 볼 수 없게 됐다. 혹여나 다른 사람에게 들킬지 모르니 햇볕에 내놓고 말릴 수도 없었다.
할머니는 자식들의 배에 젖은 성경을 한 장 한 장 펴 올려놓고, 그 체온으로 정성스레 말렸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죽탕”이 되어 복원이 어렵게 된 성경의 일부분을 불에 태우기로 했다. 비록 한 부분이지만 아깝고 귀한 성경을 태우려니 여간 마음이 안 좋은 게 아니었다. 할머니는 그 재를 가루 내어 다섯 자녀들과 함께 나눠먹기로 했다.
그날 밤. 온 식구가 밥상 앞에 둘러앉았다. 성경을 태운 재를 탄 물이 그릇에 담겨 있었다. “주님의 씨앗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한 사람씩 들이켰다. 그때 7살이던 막내아들이 “하나님, 성경을 먹으면 영원히 배고프지 않나요?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 그릇 먹겠어요. 우리 어머니 하루 속히 안식일 지킬 수 있게 해 주세요”라며 기도했다. 이 아들이 앞서 언급했던 사형대로 끌려가던 어느 재림교회 목사 부부가 맡긴 아이였다. 그 역시 당의 눈을 피해 복음을 전하다 발각돼 34살의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99년. 할머니는 아들과 함께 극적으로 탈북에 성공했다. 그러나 당시 머물던 중국의 한 거처에서 매일 밤 눈물로 베갯잇을 적셨다. 북한에 두고 온 딸과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챙기지 못한 성경 때문이었다. 목숨을 내놓고 지켰던 성경이 눈앞에 아른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아들이 의아해하며 “자유를 찾았는데 왜 자꾸 우시냐?”고 여쭸다.
“성경을 두고 왔어”
“성경이야 여기도 많은데, 아무려면 어때요?”
“아니야. 그 성경이어야 해. 반드시 그 성경이어야 한다고”
다른 성경을 구해주겠다고 몇 번을 설득했지만, 할머니는 한사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의 삶과 추억이 담긴 성경을 결코 잊지 못했다.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노모(老母)의 모습에 아들은 다시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 어머니의 성경을 되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사람들이 할머니를 방문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다른 교파의 선교사였다. 그들은 성경을 자신에게 주면 한국에 보내주겠다고 달콤한 제안을 건넸다. 하지만 할머니는 결코 그럴 수 없다며 딱 잘라 거절했다.
어떤 이는 당시 돈으로 10만 위안(약 1700만원)을 줄 테니 팔라고 했다. 굶어 죽어가는 북한의 가족이 한평생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거금이었다. 이 성경은 그때까지 말로만 전해지던 북한 지하교회의 존재를 증명하는 생존자의 증거물이었기 때문에 교파를 떠나 매우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미 북녘의 이웃 가운데 60가구가 아사했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오던 때여서 아들 역시 성경을 팔자고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내 한국에 안가면 안 갔지 이건 못 판다. 금궤를 갖다 줘도 이 성경만큼은 절대 안 된다”며 돌려보냈다. 그만큼 이 성경이야말로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할머니의 보물이었다.
평생을 품에 안고 생명처럼 귀하게 여긴 이 성경을 할머니는 후학들을 위해 지난 2017년 3월 삼육대박물관에 기증했다.
분단 이후 재림교인이 북한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안식일에 예배를 드려온 사실을 확인한 유일한 생존자였던 이순옥 할머니가 흙으로 돌아가던 날. 삼육대박물관 3층의 성경자료실 한편에는 그의 빛바랜 성경이 다른 성경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검열을 피하기 위해 때로는 찬장 벽에, 때로는 전신주 밑에, 때로는 뒤뜰에 숨겼던 손때 묻은 성경에는 빗물자국과 퇴색한 세월의 흔적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지만 그가 펼쳐놓은 전도서 7장과 8장은 주인을 대신해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한국 교회에, 아니 세계 재림교회에 위대한 신앙의 유산으로 남은 할머니의 성경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에겐 그런 믿음이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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