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홍준의 삼육동 통신] 청춘의 독서⑥ 서경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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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 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20.04.23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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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정신세계로의 여행” ... ‘데이트 폭력’ 국내 첫 개념화
코너 이름인 <청춘의 독서>는 유시민 작가의 동명 저작에서 따왔다. 하지만 기획 의도는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p.141)는 문장에 보다 가깝다.
청춘은 느닷없이 지나가 버렸지만, 저들의 인생에 여전히 깊고 뚜렷한 흔적으로 남아있는 ‘책’에 관해 묻는다. 그리고 그 대답을 함께 나눈다.
이 대화가 삶의 갈림길에 선 삼육동의 청춘들뿐 아니라, <재림마을> 가족에게도 유의미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라 여겨 해당 기사를 여기 공유한다. - 편집자 주 -
▲ 교수님께 독서란 무엇인가요?
- 저에게 독서란 ‘여행’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정신세계로의 여행’입니다. 책을 통해 우리는 저자의 정신세계를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철학책은 그 자체가 인간의 정신, 삶, 사유를 다루지요. 그 과정이 마치 여행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며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기에, 저에게 독서란 정신세계로의 여행입니다.
▲ 청춘 시절 주로 어떤 책을 많이 읽으셨나요?
- 대학교 1~2학년 때는 소위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에 속하는 일반교양 서적을 많이 읽었습니다. 에세이나 수필 같은 그다지 난해하지 않은 책들이죠. 그중에 레오 버스카글리아의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라는 책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저자가 서던캘리포니아대학에서 했던 ‘사랑학 강의’(Love Class) 내용을 글로 엮은 책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 고유한 한 사람이라는 존재가 참 매력적이고 가치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러면서 인생을 배우는 과정이 수필 형식으로 쓰여 있습니다. 굉장히 매력적인 책이라 읽고 또 읽으면서 지금까지 백번은 읽었을 겁니다. 영어 원서로도 수십 번은 읽었습니다.
3~4학년 때는 심리학, 철학 서적을 많이 봤습니다. 철학 분야에서 기본서라고 하는 책부터 시작해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등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책에 심취했습니다. 물론 그때는 당연히 다 이해를 하진 못했지만요. (웃음)
▲ Q. 책을 정말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원래는 그렇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지만, 고등학교는 이과를 나와서 책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 신입생 때 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어느 날 재밌는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도서관에는 몇 백만 권의 책이 있는데, 책 제목만 보는 데도 6개월이 걸린다고요.
다음날 학교 도서관에 가봤습니다. 6개월까진 아니지만, 적어도 한두 달은 걸리겠다 싶더군요. 그렇게 책 제목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입으로 소리 내서 읽는 게 아니라, 책 제목을 유심히 눈으로 따라내려 갔습니다. 그렇게 도서관을 여행하는 것처럼 둘러보고 나니 2주 만에 다 읽더군요.
▲ 무엇이 달라지던가요?
- 생각보다 굉장히 재미있고 매력적인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책에 굉장히 관심이 많이 가게 됐습니다. 어디에 가면 어떤 책이 있는지 대강은 알 수 있게 되면서 도서관과 저절로 친해졌습니다. 책 제목을 쭉 보면서 기억해 놨다가 관심 가고 흥미 있는 책은 나중에 꺼내서 읽기도 하고요.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가 있잖아요.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은 거야. 어떤 초콜릿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듯, 인생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저에게 도서관은 그런 초콜릿 상자였습니다.
▲ 심리학을 전공하셨습니다. 어떤 계기였나요?
-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사람의 의식이나 영혼에 대한 의문이 많았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똑같이 생각할 수 있을까,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전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도대체 정신세계라는 것은 무엇일까. 잔디밭에 누워서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정신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적이 있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혼수상태로 43일을 보내고, 14개월 조금 넘게 입원하다 퇴원했습니다.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니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할 수밖에 없더군요. 친한 친구가 군사훈련을 받다가 죽고, 같은 동네 친구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의 정신이나 영혼, 마음에 굉장히 관심을 두게 됐고, 심리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 우리나라에서 ‘데이트 폭력’ 문제를 처음으로 이슈화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2000년도 초 미국 위스콘신대 알코올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었습니다. 알코올중독을 연구하다 보니 데이트 폭력과 연결되더군요. 당시 미국에서 사회적으로 데이트 폭력이 문제가 되고 있어서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고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 데이트 폭력과 중독이 구체적으로 어떤 관련이 있나요?
- 데이트 폭력도 일종의 중독 현상입니다. 학계에서는 ‘관계중독’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데이트 폭력은 대부분 상대에 대한 집착 때문에 가해하고, 피해도 당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본인은 이게 아니라는 걸 알지만, 인간관계에 대한 굉장한 갈망을 키워온 사람은 쉽게 끊어내질 못합니다. 좋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집착이 너무 강하기에 역설적으로 심각한 폭력으로까지 이어지는 겁니다. 스토킹도 2/3 이상이 연인이나 연인이었던 사람들끼리 일어납니다. 이처럼 데이트 폭력은 중독의 정의에 거의 부합하는 유형을 보이기에 중독의 한 영역으로 봅니다.
당시 논문을 쓰면서 한국에서도 데이터를 많이 모았습니다. 그런데 국내 매스컴에서는 이 문제를 다룬 곳이 전혀 없더군요. 2001년 보도자료와 논문을 정리해서 4대 일간지 사회부 기자들에게 보냈습니다. 마침 중앙일보 기자에게 회신이 와서 취재에 협조했습니다. 사회면 절반 이상을 할애한 특집 기사가 나오면서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됐고, 방송에서도 연달아 데이트 폭력 문제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 ‘데이트 폭력’이라는 용어도 우리나라에서 처음 사용하셨죠.
- 영어로는 ‘Dating violence’입니다. ‘데이팅 폭력’ ‘데이트 폭력’으로 쓰려니, 영어와 한국어를 섞은 조어라서 어색한 느낌이었습니다. 처음엔 ‘연애폭력’으로 번역해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취재기자가 ‘연애’라는 단어의 어감이 좋지 않다면서 ‘데이트 폭력’으로 쓰자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논문과 방송에서 그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 학자로서 보람이 크셨을 것 같습니다.
- 당시 무료로 진행하는 온라인 상담소도 꽤 오래 운영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데이트 폭력을 처음 연구한 것은 아니지만, 일반에 알렸다는 점에서 보람이 크죠. 최근에는 입법 논의가 오가고, 대통령까지 심각성을 이야기할 정도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데이트 폭력을 연구하는 연구소도 많이 생겼습니다. 일선 경찰들은 단순한 사랑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심각하게 대처를 하고요.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지난 국회에서 ‘데이트 폭력 방지법’이 결국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보다 실효성 있고 강력한 법 규정이 필요합니다. 총선을 맞아 각 정당이 여성 관련 정책과 공약으로 데이트 폭력을 많이 언급하고 있어서 긍정적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 요즘은 어떤 책을 많이 읽으시나요?
- 대학 시절에는 책을 정말 많이 읽었습니다. 아마 못해도 4년간 1~2천 권은 읽었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부끄러운 얘기지만, 1년에 1권 읽는 게 어렵습니다. 논문은 1년에 수백 편을 읽고, 온종일 책과 글에 파묻혀 살지만, 독서는 몇 년째 전혀 못 하고 있습니다. 이건 정말 메마른 삶이죠.
책 3페이지를 읽으면서 3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게 독서입니다. 정신세계로의 여행이죠. 읽으면서 생각하고 감동하고, 무언가를 발견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살 지울 수 있습니다. 아마 은퇴하면 가능할 것 같아요. (웃음) 항상 꿈이죠. 책을 많이 읽고 싶습니다. 사색도 하고, 산책도 다니고, 여행도 다닐 겁니다. 저녁에는 와이프와 영화를 볼 거고요.
▲ 독서는 청춘 시절이 아니면 할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 정말 그렇습니다. 청춘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 독서지만, 청춘이기에 꼭 필요한 게 독서이기도 합니다. 정신이 맑고,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을 때 책을 읽으면 얻는 게 더 많거든요. 책에 빠져서 고뇌하고 내 미래를 고민하는 것은 참 멋진 일이죠. 나중에 나이 들면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교수 생활 하면서 학생들에게 독서를 굉장히 많이 강조했습니다. 지금 인터뷰 내용도 강의에서 많이 이야기했던 내용이에요. 그런데 문득 지난 5년간은 책 얘기를 전혀 못 하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책을 못 읽고 살았던 거죠. 인터뷰 준비하면서 청춘 시절에 읽었던 책들도 새삼 꺼내 보고, 현재 나의 삶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좋은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p.s. 서경현 교수는 지난 20여 년간 중독심리를 연구하고 교육해온 중독심리학 분야 중견학자다. 한국중독상담학회장, 서울시립창동인터넷중독예방상담센터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형 온라인 공개강좌 케이무크(K-MOOC)에 ‘중독상담’ 강좌를 개설한 바 있다. 지난해 말에는 공저 <중독상담학개론>이 2019년 세종도서 학술부문에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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