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연합회

본문 바로가기
더보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학교법인

그리스도인 교수학습이론 축약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낙진 쪽지보내기 작성일2001.05.21 08:21 조회수 7,383
글씨크기

본문

제목 : 교수 학습과정 ( 교회 교육의 학습이론 )

학습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
교사와 학습자는 서로 협력하면서 똑같은 일에 참여하지만 교수-학습활동에 대하여 그들 각자에게 분담된 일은 명백히 구분된다. 교사의 업무는 학습을 촉진시키는 것이며 개개인은 그들에게 주어진 학습을 해야한다. 학습자는 자신의 일을 쉽게 수행하기 위해 교사에게 의지하지만 학습자가 없다면 교사의 역할은 무의미해 진다.
기독교 교사들은 성서적 계시와 현대 교육이론에서 자신들의 업무에 대한 이해를 인출해 내는데 대부분의 교육심리학자들의 통찰력과 관점이 일치한다.

학습의 정의
학습이란 경험의 결과로서 영속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하나의 과정이다.

과정에서의 학습 - 과정이라는 용어는 학습의 정의에 있어서 핵심적인 용어이다. 이것은 학습자의 경험 속으로 들어오는 많은 요소들 사이의 융화와 결정. 그리고 지속적인 상호 작용등을 제시한다., 인간은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변화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교사는 결코 동일한 학습자와 두 번 다시 연관을 맺을 수 없다. 학급에서 일어나는 것은 교실 밖에서 일어나는 학습자의 생활에 의해 항상 영향을 받는다.
기독교 교사들이 명심해야 할 부분은 인간의 영적 본성이 독자적으로 취급될 수 있는 것이라고 쉽게 믿는 경향이다. 경험이 전혀 없는 백지 상태로 성경공부반 이나 교회훈련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학습자는 일상생활의 시련 속에서 그가 경험하는 모든 관심, 선입관, 가치, 기쁨, 고통, 열망, 원한 그리고 개인적인 필요등을 가지고 온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그가 경험하는 대상과 방법에 강한 자극을 준다.

변화로서의 학습 - 모든 학습은 어떤 종류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다. 만일 학습자가 어떤 면에서든지 변화하지 않았다면, 그는 배운 것이 아니다.
변화는 정신운동 신경발달일수도 있고 신경계통의 재구성일 수도 있다. 변화의 형태가 무엇이든 간에 변화는 모든 학습경험의 특징이다.
학습은 학습자의 두뇌에 저장된 자료의 양을 증가시킬 수도 있다. 학습자는 아이디어를 보다 효과적으로 조직화하고, 보다 효율적으로 신체적 업무를 수행하도록 배울 수 있으며, 또한 사람, 사물, 견해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하도록 배울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경험에 있어서 공통적인 성질은 변화이다.
변화는 노력의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예, 타자기의 자판을 보고치는 방식에서 보지 않고 치는 방식으로 바꾸는 노력)

영속적 변화로서의 학습 - 학습이란 어느 정도의 기억의 문제에 관련되지 않고서는 적당하게 정의될 수 없다. 영속적이란 어느 정도의 시간을 의미하는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억되어야 하는가?
어떤 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억되어야 하는가? - 인식과 회상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자료를 기억하려는 사람이 그것을 배웠던 상황의 유사성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학습자가 세부적인 여러 사항을 회상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학습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추정할 수 없다,

경험의 결과로서의 학습 - 일부 교사들은 오로지 경험을 접촉하기, 손으로 다루기, 바라보기, 듣기, 쓰기, 냄새맡기, 등과 같은 명백한 활동으로 연관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학생들이 계획, 그룹활동, 혹은 여러 가지 창의적인 활동에 바쁘게 참여하지 않으면 학생들은 실제적으로 많은 것들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와 같은 활동들을 경험을 통한 학습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학습은 어떤 종류의 경험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에 모든 학습은 경험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주로 신체적인 지각 통로를 통해서 자기 주위의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교사들은 또한 학습자가 경험하는 환경에는 영적인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고 믿는다.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을 감동시킬 때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듣는 것 보다 더 중요한 학습
교사의 음성구조로부터 나오는 소리는 학습되기 전에 몇 가지 장애물을 극복해야만 한다.
첫째- 청각신호는 학습자의 제1차 감각기관에 의하여 선택되어야 한다(잘못 듣는 실수, 정 확치 못한 발음, 소음 등의 방해)
둘째 - 학습자의 지각세포는 이 신호들이 장면으로 바뀌고 예비 해석이 주어지는 중앙 신 경계통에 자극을 전달해야 한다( 딴 생각이 신호들을 소멸시킬 수 있음)
셋째 - 신경계통에 전달된 자극은 의미 있는 형태로 변형되어야 한다.
교사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 비록 잠재되어 있는 장벽들 모두를 통해서 이루어진 다고 할지라도 학습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거의 정확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메시지는 지금 학습자의 인식 구조 속에 종합되어야 하고, 그의 기억 속에 보관되 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정상 이러한 단계는 학습자의 정서적 상태, 자각, 선 험, 가치체계, 언어기술 등과 같은 여러 변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룹 토의 등에서와 같이 학생들이 자신의 말로 바꾸어서 즉흥적으로 설명하는 기회를 가질 때 더 깊이 있는 학습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 토의를 통하여 개인이 자신의 진술을 설명하고, 재설명함에 따라 자신의 진술을 더 명백하게 제시하며, 종종 불확실하거나 왜곡된 부분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교정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가지고 있는 신념과 (견해) 새로운 견해가 서로 충돌할 때 조화될수 없다면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포기한다. 새로운 견해를 받아들이고 이전의 견해를 포기한다면 새로운 지식이 학습될 것이다.

지식의 변형
불트만이 관찰한 지식에 대한 헬라인과 히브리인의 다른 개념
헬라인은 지식을 순수한 진리 이하의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하여 간격을 두고서 그것을 주시만 하였지 결코 접촉하지 않았다.
히브리인은 지식을 경험하고 그것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지식의 대상을 이해하게 되었다
C H 도드 : 헬라인 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궁극적인 실체를 사색하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속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며, 그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다. 헬라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순수 사고의 추상적인 형태이며,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며, 그의 계명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동사 야다의 경험적 지식과 관계됨 - 성서적 개념
랍비들도 기껏해야 여러 사실들을 머리에 주입시키고 그리고 기계적으로 단조롭게 그것들을 인용하는 그런 종류의 학습 방법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버거 걸하드슨 :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입으로 말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한 채 많은 양의 본문의 자료를 암기한 사람들을 유머와 풍자로 비평하였다. 그들은 그러한 사람들을 자기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주문을 외우는 마술가 들이나, 혹은 두루마리로 가득 채워져 있는 생명없는 바구니에 비유하였다. - 배운 대로 삶을 살기를 바란 모습
랍비에 의하면 제자는 공인된 전통을 담는 생명 없는 저장소가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동의하기 위하여 그 속에 들어가야 한다. 단순히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실제적으로 그것에 의해 살아가고 , 그것에 대해 충실한 청지기가 되며, 그것을 전염성의 방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 할 수 있다. 전통에 대한 살아있는 전달자는 다른 횃불들의 불을 밝게 하기위여 꺼져가는 횃불에 의해 불이 붙여진 횃불과도 같다-
예수님도 귀중히 여겼던 경험적 학습 - 눅11:28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마태 28: 20 - , 눅6:46- 주여 주여 하면서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지상명령에서 쉽게 지나쳐 버리는 단어는 지키다라는 것이다. 지키게 하라는 단어를 삭제하면 교회의 교육적 사명의 본질은 급격하게 변질될 것이다. 헬라어 부정사 테레인은 간직하는 것, 감시하는 것, 보존하는 것, 성취하는 것, 주의를 기울이는 것 지키는 것등을 의미한다 명백하게도 예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이 무의미한 암송문구들의 수집이 되도록 할 의도는 없었다. -누가복음 6:46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학습이 인격의 중심에 침투되어져야 하며, 매일의 경험이 씨줄과 날줄이 엮여지듯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히브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 이러한 사실에 관하여 신약성서에서의 가장 강력한 진술 중의 하나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2 - 바울의 글 속에서 누스(마음)이라는 단어는 지식과 이해가 함께 작용하는 지력을 의미하지만 , 훨씬 더 광범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누스는 또한 하여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결정하는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의지를 포함한다. 불트만이 지식과 이해가 없이는 작정하는 것과 계획하는 것은 없다 고 말한 것처럼 , 바울에게 있어서도 어떤 것을 계획하거나, 또한 어떤 행동을 목표로 하는 것과 관계된 것에는 항상 지식과 이해가 있었다.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지식과 이해로 이루어진 사고의 과정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인격의 변화와 삶의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그 이상의 것이 되게 한다. 이것이 기독교 교육의 궁극적 목적이다.

기독교 교육의 내용

내용과 방법 - 내용과 방법이라는 용어들이 서로 완전히 다르다 할지라도, 방법을 내용에 대항시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방법과 내용은 상호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들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용어들이다. 교수 학습의 상황에 있어서 주제가 방법의 결정 요소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방법은 필수적으로 내용의 일부분이 된다. 내용과 방법은 함께 생겨난다. 방법이 없는 내용이 있을 수 없고 매개체 없는 메시지는 있을 수 없다 가르치는 것은 어떤 종류의 방법에 의해 가르쳐야 한다. 강의를 통해 어떤 성경구절들을 가르치려는 교사들은 사실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슬라이드 필름이나 극화 형식을 사용하여 가르치는 교사와 마찬가지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내용과 지식 - 지식은 단순히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학습자는 이전의 경험으로 지식을 조작하고, 재구성하고, 조합함으로써 환경으로부터 나오는 자료들에 반응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지식이 상호 교신하게 될 때 형성된다. 지식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자극과 개인적인 경험의 합성물이 된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정보가 학습자에게 주어졌을 때 학습자가 단순히 그것을 흡수 동화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바로 그 때에 그 새로운 정보에다가 무엇인가를 첨가한다.
"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권고를 포함한 에베소서 5장의 말씀을 연구하는 한 그룹의 여인들을 머리 속에 연상하자. 학급 원 중의 한 여인은 정서적으로 성숙하며 사랑하는 남편과 이상적인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다른 여인은 주말마다 짐승으로 변하고, 자녀를 학대하며, 값싼 술을 사기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집에서 물건을 몰래 훔쳐 가는 알콜 중독자와 결혼하였다. 이 두 여인에게 있어서 그 성경본문은 동일한 의미를 전달해 주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성경공부 시간 동안 그들이 그 성경구절을 알게 되는 것은 그들이 이미 삶에 대한 이해하는 바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다.

내용의 석고화 - 교육의 내용은 문어든지 구어든지 말로 된 자료와 동의어이며, 방법론은 단순히 여러 말들을 교사로부터 학습자에게 효율적으로 이동시키는 기술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믿는다. 이러한 개념은 오늘날의 기독교 교육을 계속해서 무기력하게 만드는 가장 위험스런 영향력중의 하나이다.
문자적인 내용이 직접적인 경험과 동떨어질 때 그것은 석고화 되는 경향, 즉 단단하고 돌같은 실체로 변하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 교육이 단순히 단어의 전달에 불과할 때 그리고 그 이상이 되지 못할 때 이러한 경향이 항시 발생한다.
종교적인 체험을 설명한 말들을 배운다는 것과 종교적인 체험을 가진다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기록된 형태로 제시되기 오래 전에 매일 실존하는 인간의 인격체에 전달되었다. 이러한 살아있는 말씀은 감정 속에 스며들었고, 가치를 변화 시켰으며, 관계성을 회복시켰고 삶을 변화 시켰다.
요한 일서의 서두에서 체험된 말씀이 문자로 기록된 그 말씀보다 선행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제시해 주고 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여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그 구절을 쓴 기자는 계속해서 자신이 이러한 경험을 언어로 기록하고 있는 이유를 말한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 영감 받은 기자의 기록목적은 교회학교의 공부시간에 지적 훈련을 위한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변화시키고 삶을 구속하며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는 경험의 영역으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언어적인 상징 부호는 성서적인 전승의 보존과 전달을 위한 매개체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기독교 교육이 성경말씀을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것만으로 끝나 그 외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면, 성서의 계시는 충분한 결실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일부사람들이 방법을 무시한 채 성서의 내용을 전달하려고 시도해 온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일부 사람들은 내용을 무시한 채 방법에만 주의를 기울여 왔다 우리는 이러한 두 가지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기독교 교사들은 학습경험을 계획함에 있어서 오른쪽 뇌와 왼쪽 뇌- 사고방식의 차이- 사이에 올바른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예술적, 상상적, 상징적, 직관적 학습 경험을 통하여 진리를 전달하는 데도 매우 능숙해야 하지만 논리적, 분석적 사고방식을 거부해서는 않된다.
기독교 교사들은 활동교육을 천박한 활동으로 결코 퇴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성적인 성경공부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일 콜라쥬 기법 효과를 내는 것, 그룹토의에 참여하는 것, 역할 학습에 참여하는 것들이 분별력 있게 사용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필수적으로 의미 있는 학습이 되지 못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듣는 것은 이해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며 분류하는 것은 경험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고, 그리고 기독교 교육과 학습내용은 언어적인 문구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라는 유혹적인 주장의 희생물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시대의 유명한 선교사 중 하나인 스탠리 존스는 신학교 예배시간에 "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는 말씀에 대해 설교하면서 " 말씀이 육신이 될 때 비로소 세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본문이 말씀이 말씀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은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만일 죄 없는 인간들로 하여금 말씀을 이해하게 하려면 말씀은 계속해서 육신이 되어야 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 바로 기독교 교육과 학습의 궁극적인 내용인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이트 정보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운영자: 이상용
  • 운영센터 : 02-3299-5294
Copyrightⓒ adventist.or.kr All right reserved.
Contact webmaster@adventist.or.kr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