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J. H. 켈로그는 어떻게 빗나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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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 1852-1943년)는 내과 및 외과 의사, 콘플레이크 시리얼과 수술 기구들의 발명자, 물리치료와 영양학의 선구자, 다작하는 저술가로 활약한 재림교인이었다. 16명의 자녀로 이뤄진 대가족에 태어난 켈로그는 10세 때 아버지의 빗자루 만드는 가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존이 청년시절 제임스 화잇과 엘렌 화잇은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존은 화잇의 아들들인 에드슨과 윌리의 교우였으며, 1873년에 제임스 화잇과 엘렌 화잇이 이 세 청년에게 뉴저지에 있는 R. T. 트랠의 위생 치유 대학(R. T. Trall's Hygieo-Therapeutic College)에 다니라고 독려했다. 켈로그는 의학을 깊이 사랑하게 되어, 미시간 대학교와 뉴욕 시의 벨뷰 병원 의대(Bellevue Hospital Medical College)에서 계속하여 교육을 받았다. 그는 왕성한 지식욕을 갖고 있어서, 여가 시간에는 추가로 개인교사를 고용하여 학업을 보충했다. 그는 학업을 마친 후 건강 개혁원(Health Reform Institute)으로 돌아와 일했는데, 24세에 그곳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불과 10년 전에 설립된 미비한 기관을 잘 경영하여 배틀크리크 위생병원이라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곳으로 만들어 놓았다.
엘렌 화잇은 켈로그를 멘토링함으로써 그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나타냈고, 그래서 그도 그녀를 가장 신뢰하고 막역한 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겼다. 그녀는 그에게 어머니 같은 관심을 갖고, 그가 영적으로뿐 아니라 전문가로서도 최고의 능력을 나타내기를 바랐다. 그녀가 켈로그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는 교회 지도자들이 그를 비평할 때 그녀가 빈번히 그의 방패막이가 되어 준 사실에 여실히 드러난다. 엘렌 화잇의 가족 외에 S. N. 해스켈 말고는 켈로그만큼 그녀에게 편지를 많이 받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화잇과 켈로그는 서로를 깊이 존중했고, 훗날 그녀는 켈로그에게 “참된 친구”였다고 술회했다(Lt 3, 1899). 1878년에 기록된 현존하는 하나의 편지를 제외하곤 그녀가 켈로그와 나눈 광범위한 교신은 그가 배틀크리크 위생병원장으로 봉직할 때 주고받은 것이다.
1886-1890년에 그녀가 켈로그에게 준 권면들은 전반적으로 세 가지 주요 주제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 그녀는 그에게 과로에 대해 주의를 주었다. 그녀는 “그대는 1년 동안 2년의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이에 대해 항거하는 바이다.”라고 썼다(Lt 10, 1887). 그의 교육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투자했는데 그가 과로하여 일찍 무덤에 묻힌다면, 아직 맘껏 펴보지도 못한 그의 재능은 말할 것도 없고 교단에 얼마나 손실이 될 지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엘렌 화잇은 그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도록 먼저 그 자신의 생명을 구하라고 그에게 권면했다(Lt 64, 1886, Lt 10, 1887). 둘째, 그녀는 그의 영적 삶에 대해 권면했다. “인류에게서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여기서 지금껏 일해 온 자들 가운데 그대보다 하늘을 더 인정한 자를 나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예수를 위해 살라. 그대가 그리스도를 그대의 지도 의사로 삼는다면 위생병원 의사로서 더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대가 생명의 면류관을 열렬하게 구해야 한다고 여전히 말하는 바이다.”(Lt 8, 1886). 켈로그에 대한 그녀의 염려 가운데 그가 과학을 성경 위에 두지 않도록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이 포함되었다. 셋째, 그녀는 다른 사람을 딛고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분투하려는 그의 성향에 대해 경고했고(Lt 64, 1886), 그를 안내하는 데 돕고 일을 위임할 유능한 의사들을 그의 주변에 두라고 조언했다. 초기에 켈로그는 그녀의 권면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그가 성공을 거둔 것도 그런 권면에 유의했기 때문이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엘렌 화잇이 켈로그와 나눈 편지는 1890년대 그녀가 호주에 있던 동안에 더 늘어났다(1891-1900년). 1890년대 초반에 그녀는 그에게 재림교회 고아원인 해스켈 홈(Haskell Home) 건립 및 배틀크리크 위생병원을 위한 새 예배당 건립을 포함하는 배틀크리크를 발전시키는 것에 대해 권면했다(Lt 18, 1890). 이와 함께 그녀는 세상 다른 곳에서는 선교 사업이 생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교회 사업을 한 곳에만 지나치게 집중화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럽게 경고했다. 엘렌 화잇은 의사들이 그들의 봉사에 대해 “과분한 대가”를 요구하는데 위생병원 일꾼들에게도 적절한 임금을 줄 필요가 있다고 그에게 권면했다(Lt 41, 1890). 그녀는 켈로그에게 과학이라는 인간적 사상을 영원히 중요한 진리의 개념들 위에 둘 위험에 처해 있다고 강하게 경고했다(Lt 18, 1892). 아울러 그녀는 그에게 라이프스타일 교육에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목회자들과 협력하여 일하라고 권면했다. 의사라는 직분은 높으신 부르심이었고, 따라서 그녀는 자신들의 업을 그만두고 목회로 나가려는 의사들(그들이 있는 곳에서 유능하게 일하고 있다면)을 설득하고 만류했다(Lt 34, 1892; Lt 86a, 1893). 그뿐 아니라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배틀크리크에서 교육을 도와왔던 몇몇 학생들의 복지를 자신을 대신하여 보살펴 주라고 켈로그에게 부탁하기도 했다(Lt 36a, 1893). 심지어 엘렌 화잇은 전문가인 켈로그에게 그의 의학적 조언을 구하고 그녀 자신을 위해 그의 의학적 제안을 따르려고 노력했다(Lt 85, 1893; Lt 67, 1899).
1890년대를 지나면서 엘렌 화잇은 켈로그와 교회 지도자들 간에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것에 대해 점점 걱정하게 되었다(Lt 86a, 1893). 그녀는 또한 켈로그의 동생 윌 키쓰(Will Keith)의 영적인 건강을 염려하면서 그의 동생을 회의주의에서 구하는 데 형의 모본이 중요하다고 권면했다(Lt 8a, 1899). 그녀는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미 기관이 설립된 지역에 기관을 더 확장하는 대신 호주나 그 밖의 세계 다른 지역들에서도 선교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대단히 필요하다고 보았다(Lt 138, 1898). 그녀는 또한 켈로그에게 시카고에서의 교단 밖 박애주의 사업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함으로써 남은 교회의 기별을 세상의 다른 지역에 전해야 할 재림교회의 사명을 잠식할 만큼은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특별히 그녀는 건강 원칙들에 관심을 끄는 영리한 마케팅 전략인 켈로그의 “복음 마차”(Gospel Wagon) 개념을 좋아하지 않았다. “미국에 ‘복음 마차’를 갖춤으로써 약간의 유익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이렇게 하여 수천 달러가 소비될 것이다. 한 기간이 끝나면 약간의 곡식단이 모일 수 있겠지만 많진 않을 것이다. 재정은 더 지속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Lt 124, 1898; 참조 Lt 114, 1898). 그 대신 그녀는 호주에 절실히 필요한 기금을 보내라고 그에게 권면했다.
훨씬 더 중요한 점은 바로 이때쯤 엘렌 화잇이 켈로그가 상당히 심각한 영적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사탄이 그대의 발을 미끄러뜨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다.”라고 썼다(Lt 132, 1898; 참조 Lt 126, 1898). 또한 그녀는 켈로그에게 성경의 느부갓네살처럼 자신을 높여 “그대의 믿음을 파선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다(Lt 123, 1898; 참조 Lt 82, 1900). 호주 사업에 재정적 자원이 부족한 것을 보고 그녀는 켈로그와 그의 동료들에게 세상 각 곳의 교단적인 기관들을 발전시키라는 직접적인 호소를 하게 된 것이다(Lt 4, 1899). 그래서 켈로그는 즉시 응답하여, 욕조와 기타 비품들을 보내 호주 위생병원을 원조했다. 그녀는 이듬해 호주를 떠날 때까지도 이 위생병원 건립에 대해 켈로그에게 조언을 구했고, 5,000불을 기부하겠다는 그의 서약에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Lt 28, 40, 1899).
1899년 한 해 동안 엘렌 화잇은 교회 지도자들과 의료 사업 지도자들 간의 연합이 필요함을 거듭 호소했다(Lt 55, 1899). 켈로그와 교회 지도자들, 특별히 대총회장 G. A. 어윈(G. A. Irwin) 사이에 힘겨루기가 일어났다. 이에 대응하여 켈로그는 자신이 교회를 떠날 수도 있다고 내비쳤다. 그러자 엘렌 화잇은 켈로그에게 하나님께서 지금껏 그에게 영향력 있는 자리를 주셨다고 납득시키면서 교단을 이탈하지 말라고 권고했다(Lt 215, 1899). 그녀는 “그대는 마치 그대에게 친구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대의 친구이며, 화잇 자매가 그대의 친구이다.”라고 덧붙였다(Lt 215, 1899). 그녀의 권면들이 얼마동안은 갈등과 긴장을 완화시켜 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계속하여 그녀는 자기 자신의 권위만 세우고 미국의 다른 의료 센터 건립에 절실히 필요한 배틀크리크 기금을 묶어 두지 말라고 권고했다(Lt 135, 257, 1899). 1899년을 지나면서 켈로그에 대한 그녀의 권고는 점점 더 통렬해졌다. 그녀는 켈로그에게 영적으로 큰 위기에 처해 있음을 경고하고, “그대에게 주어진 경고의 기별을 받아들이라. 그러면 그것이 너를 큰 시련과 굴욕에서 구해 줄 것이고 네 영혼이 구원함을 얻도록 할 것이다.”라고 촉구했다(Lt 215b, 1899).
1900년 초에 엘렌 화잇과 켈로그의 관계는 뒤틀리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켈로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가장 강한 편지 가운데 몇 개를 보냈지만 그가 그 편지들을 받고 비통함과 좌절을 나타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여러 해에 걸쳐 주의와 경고의 권면들을 그에게 보내왔으며 지금껏 그에 대한 태도를 바꾼 적이 없음을 지적했다. 엘렌 화잇은 다시 한번 그에게 교회를 떠나지 말라고 탄원했다(Lt 33, 45, 74, 1900). 더욱이 그녀는 계속하여, 호주에 기금을 보내야 했을 때도 시카고의 가난한 자들을 돕는 데 기금을 사용함으로써 드러낸 그의 판단력 부재에 대해 권면했다. 궁핍한 자들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그녀는 셋째 천사의 기별로 온 세상을 훤하게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꼈다(Lt 41, 45, 1900). 그녀는 켈로그가 “하나님의 사업을 위태롭게 할” “비뚤어진 사상들을” 포용할 큰 위험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다(Lt 73, 1900).
1901년 대총회 회기가 지나고 그 이듬해에도 엘렌 화잇은 교회 문제(특히 캘리포니아에 있는 시골 건강 요양원의 지도자에 관한 문제)에 관하여 다수의 편지를 계속 주고받았다(Lt 5, 1901). 그녀는 재림교회의 의료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음을 계속하여 주장하면서(Lt 180, 1901) 동시에 그의 야망을 누그러뜨리고 그의 영적 재생을 불러오기 위해 경고도 발했다(Lt 188, 1901). 1902년 2월 18일 지독한 화재가 배틀크리크 병원을 태워버린 직후에 엘렌 화잇은 이 사건이 특히 켈로그가 주어진 빛을 무시한 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말했으며(Lt 123, 269, 1902) 더 작은 시설들을 재건하고 의료사업을 배틀크리크에만 너무 집중시키지 말고 다른 도시들에서도 펼치라고 촉구했다(Lt 124, 125, 1902). 그러나 켈로그는 더 큰 위생병원을 재건축했다.
화재가 있기 직전에 그는 인간의 완전한 생리에 관하여 쓴 <살아 있는 성전(The Living Temple)>(Battle Creek, Mich.: Good Health Pub. Co., 1903)이라는 책의 원고를 완성했다. 화재 후 켈로그는 이 책을 판매하여 얻은 이익금을 기부하여 위생병원 재건축을 돕는 데 사용하도록 했다. 그 책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A. G. 대니얼스와 W. W, 프레스코트 등 몇몇 교회 지도자들은 책의 서두에 있는 범신론적인 부분을 보고 놀랐다. 이런 범신론적인 가르침은 엘렌 화잇이 기록한 가장 엄중한 경고 가운데 몇 가지를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교회가 맞닥뜨릴 “일련의 이단 가운데 알파[시작]”였다(Lt 265, 1903; 참조 Lt 232, 253, 1903). 1903년에 그녀는 계속하여 켈로그에게 그의 삶의 방향을 바꾸라고 촉구하는 정성어린 편지를 여러 통 썼다(Lt 55, 65, 80, 97, 107, 180, 181, 232, 245, 300, 301, 303, 1903). 그녀는 이전에 이미 했던 경고, 곧 켈로그의 가장 심각한 위험이 하나님보다 과학을 더 높이는 데 있다는 경고를 거듭했다(Lt 239, 1903). 얼마 동안 교회에서의 그의 미래는 저울에 달려 있었고, 엘렌 화잇은 그를 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켈로그가 짧게나마 자신의 위험한 상태를 인정했던 것 같다(Lt 257, 1903). 그러나 이때쯤 주사위가 던져진 것처럼 보였고, 그 후 그는 영원히 교회와 결별하였다. 엘렌 화잇은 그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도 아직 늦지 않았다고 호소했으나(Lt 360, 1906), 1906년 켈로그가 신앙에서 떠났다는 사실이 엘렌 화잇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분명해졌다(Lt 225b, 1906).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장시간의 면담을 거친 후, 1907년 11월 10일에 배틀크리크 태버내클 교회의 녹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제거되었을 때 그것은 아무에게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 후에도 엘렌 화잇이 그에게 계속하여 돌아오라고 호소했지만 그는 더 이상 그녀와 교신하지 않았다(Lt 100, 1911). 켈로그는 1943년 죽을 때까지 배틀크리크 위생병원을 경영하는 데 계속 활동하였다.
-Michael W. Cambell
엘렌 화잇은 켈로그를 멘토링함으로써 그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나타냈고, 그래서 그도 그녀를 가장 신뢰하고 막역한 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겼다. 그녀는 그에게 어머니 같은 관심을 갖고, 그가 영적으로뿐 아니라 전문가로서도 최고의 능력을 나타내기를 바랐다. 그녀가 켈로그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는 교회 지도자들이 그를 비평할 때 그녀가 빈번히 그의 방패막이가 되어 준 사실에 여실히 드러난다. 엘렌 화잇의 가족 외에 S. N. 해스켈 말고는 켈로그만큼 그녀에게 편지를 많이 받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화잇과 켈로그는 서로를 깊이 존중했고, 훗날 그녀는 켈로그에게 “참된 친구”였다고 술회했다(Lt 3, 1899). 1878년에 기록된 현존하는 하나의 편지를 제외하곤 그녀가 켈로그와 나눈 광범위한 교신은 그가 배틀크리크 위생병원장으로 봉직할 때 주고받은 것이다.
1886-1890년에 그녀가 켈로그에게 준 권면들은 전반적으로 세 가지 주요 주제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 그녀는 그에게 과로에 대해 주의를 주었다. 그녀는 “그대는 1년 동안 2년의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이에 대해 항거하는 바이다.”라고 썼다(Lt 10, 1887). 그의 교육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투자했는데 그가 과로하여 일찍 무덤에 묻힌다면, 아직 맘껏 펴보지도 못한 그의 재능은 말할 것도 없고 교단에 얼마나 손실이 될 지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엘렌 화잇은 그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도록 먼저 그 자신의 생명을 구하라고 그에게 권면했다(Lt 64, 1886, Lt 10, 1887). 둘째, 그녀는 그의 영적 삶에 대해 권면했다. “인류에게서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여기서 지금껏 일해 온 자들 가운데 그대보다 하늘을 더 인정한 자를 나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예수를 위해 살라. 그대가 그리스도를 그대의 지도 의사로 삼는다면 위생병원 의사로서 더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대가 생명의 면류관을 열렬하게 구해야 한다고 여전히 말하는 바이다.”(Lt 8, 1886). 켈로그에 대한 그녀의 염려 가운데 그가 과학을 성경 위에 두지 않도록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이 포함되었다. 셋째, 그녀는 다른 사람을 딛고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분투하려는 그의 성향에 대해 경고했고(Lt 64, 1886), 그를 안내하는 데 돕고 일을 위임할 유능한 의사들을 그의 주변에 두라고 조언했다. 초기에 켈로그는 그녀의 권면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그가 성공을 거둔 것도 그런 권면에 유의했기 때문이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엘렌 화잇이 켈로그와 나눈 편지는 1890년대 그녀가 호주에 있던 동안에 더 늘어났다(1891-1900년). 1890년대 초반에 그녀는 그에게 재림교회 고아원인 해스켈 홈(Haskell Home) 건립 및 배틀크리크 위생병원을 위한 새 예배당 건립을 포함하는 배틀크리크를 발전시키는 것에 대해 권면했다(Lt 18, 1890). 이와 함께 그녀는 세상 다른 곳에서는 선교 사업이 생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교회 사업을 한 곳에만 지나치게 집중화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럽게 경고했다. 엘렌 화잇은 의사들이 그들의 봉사에 대해 “과분한 대가”를 요구하는데 위생병원 일꾼들에게도 적절한 임금을 줄 필요가 있다고 그에게 권면했다(Lt 41, 1890). 그녀는 켈로그에게 과학이라는 인간적 사상을 영원히 중요한 진리의 개념들 위에 둘 위험에 처해 있다고 강하게 경고했다(Lt 18, 1892). 아울러 그녀는 그에게 라이프스타일 교육에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목회자들과 협력하여 일하라고 권면했다. 의사라는 직분은 높으신 부르심이었고, 따라서 그녀는 자신들의 업을 그만두고 목회로 나가려는 의사들(그들이 있는 곳에서 유능하게 일하고 있다면)을 설득하고 만류했다(Lt 34, 1892; Lt 86a, 1893). 그뿐 아니라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배틀크리크에서 교육을 도와왔던 몇몇 학생들의 복지를 자신을 대신하여 보살펴 주라고 켈로그에게 부탁하기도 했다(Lt 36a, 1893). 심지어 엘렌 화잇은 전문가인 켈로그에게 그의 의학적 조언을 구하고 그녀 자신을 위해 그의 의학적 제안을 따르려고 노력했다(Lt 85, 1893; Lt 67, 1899).
1890년대를 지나면서 엘렌 화잇은 켈로그와 교회 지도자들 간에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것에 대해 점점 걱정하게 되었다(Lt 86a, 1893). 그녀는 또한 켈로그의 동생 윌 키쓰(Will Keith)의 영적인 건강을 염려하면서 그의 동생을 회의주의에서 구하는 데 형의 모본이 중요하다고 권면했다(Lt 8a, 1899). 그녀는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미 기관이 설립된 지역에 기관을 더 확장하는 대신 호주나 그 밖의 세계 다른 지역들에서도 선교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대단히 필요하다고 보았다(Lt 138, 1898). 그녀는 또한 켈로그에게 시카고에서의 교단 밖 박애주의 사업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함으로써 남은 교회의 기별을 세상의 다른 지역에 전해야 할 재림교회의 사명을 잠식할 만큼은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특별히 그녀는 건강 원칙들에 관심을 끄는 영리한 마케팅 전략인 켈로그의 “복음 마차”(Gospel Wagon) 개념을 좋아하지 않았다. “미국에 ‘복음 마차’를 갖춤으로써 약간의 유익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이렇게 하여 수천 달러가 소비될 것이다. 한 기간이 끝나면 약간의 곡식단이 모일 수 있겠지만 많진 않을 것이다. 재정은 더 지속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Lt 124, 1898; 참조 Lt 114, 1898). 그 대신 그녀는 호주에 절실히 필요한 기금을 보내라고 그에게 권면했다.
훨씬 더 중요한 점은 바로 이때쯤 엘렌 화잇이 켈로그가 상당히 심각한 영적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사탄이 그대의 발을 미끄러뜨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다.”라고 썼다(Lt 132, 1898; 참조 Lt 126, 1898). 또한 그녀는 켈로그에게 성경의 느부갓네살처럼 자신을 높여 “그대의 믿음을 파선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다(Lt 123, 1898; 참조 Lt 82, 1900). 호주 사업에 재정적 자원이 부족한 것을 보고 그녀는 켈로그와 그의 동료들에게 세상 각 곳의 교단적인 기관들을 발전시키라는 직접적인 호소를 하게 된 것이다(Lt 4, 1899). 그래서 켈로그는 즉시 응답하여, 욕조와 기타 비품들을 보내 호주 위생병원을 원조했다. 그녀는 이듬해 호주를 떠날 때까지도 이 위생병원 건립에 대해 켈로그에게 조언을 구했고, 5,000불을 기부하겠다는 그의 서약에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Lt 28, 40, 1899).
1899년 한 해 동안 엘렌 화잇은 교회 지도자들과 의료 사업 지도자들 간의 연합이 필요함을 거듭 호소했다(Lt 55, 1899). 켈로그와 교회 지도자들, 특별히 대총회장 G. A. 어윈(G. A. Irwin) 사이에 힘겨루기가 일어났다. 이에 대응하여 켈로그는 자신이 교회를 떠날 수도 있다고 내비쳤다. 그러자 엘렌 화잇은 켈로그에게 하나님께서 지금껏 그에게 영향력 있는 자리를 주셨다고 납득시키면서 교단을 이탈하지 말라고 권고했다(Lt 215, 1899). 그녀는 “그대는 마치 그대에게 친구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대의 친구이며, 화잇 자매가 그대의 친구이다.”라고 덧붙였다(Lt 215, 1899). 그녀의 권면들이 얼마동안은 갈등과 긴장을 완화시켜 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계속하여 그녀는 자기 자신의 권위만 세우고 미국의 다른 의료 센터 건립에 절실히 필요한 배틀크리크 기금을 묶어 두지 말라고 권고했다(Lt 135, 257, 1899). 1899년을 지나면서 켈로그에 대한 그녀의 권고는 점점 더 통렬해졌다. 그녀는 켈로그에게 영적으로 큰 위기에 처해 있음을 경고하고, “그대에게 주어진 경고의 기별을 받아들이라. 그러면 그것이 너를 큰 시련과 굴욕에서 구해 줄 것이고 네 영혼이 구원함을 얻도록 할 것이다.”라고 촉구했다(Lt 215b, 1899).
1900년 초에 엘렌 화잇과 켈로그의 관계는 뒤틀리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켈로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가장 강한 편지 가운데 몇 개를 보냈지만 그가 그 편지들을 받고 비통함과 좌절을 나타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여러 해에 걸쳐 주의와 경고의 권면들을 그에게 보내왔으며 지금껏 그에 대한 태도를 바꾼 적이 없음을 지적했다. 엘렌 화잇은 다시 한번 그에게 교회를 떠나지 말라고 탄원했다(Lt 33, 45, 74, 1900). 더욱이 그녀는 계속하여, 호주에 기금을 보내야 했을 때도 시카고의 가난한 자들을 돕는 데 기금을 사용함으로써 드러낸 그의 판단력 부재에 대해 권면했다. 궁핍한 자들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그녀는 셋째 천사의 기별로 온 세상을 훤하게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꼈다(Lt 41, 45, 1900). 그녀는 켈로그가 “하나님의 사업을 위태롭게 할” “비뚤어진 사상들을” 포용할 큰 위험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다(Lt 73, 1900).
1901년 대총회 회기가 지나고 그 이듬해에도 엘렌 화잇은 교회 문제(특히 캘리포니아에 있는 시골 건강 요양원의 지도자에 관한 문제)에 관하여 다수의 편지를 계속 주고받았다(Lt 5, 1901). 그녀는 재림교회의 의료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음을 계속하여 주장하면서(Lt 180, 1901) 동시에 그의 야망을 누그러뜨리고 그의 영적 재생을 불러오기 위해 경고도 발했다(Lt 188, 1901). 1902년 2월 18일 지독한 화재가 배틀크리크 병원을 태워버린 직후에 엘렌 화잇은 이 사건이 특히 켈로그가 주어진 빛을 무시한 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말했으며(Lt 123, 269, 1902) 더 작은 시설들을 재건하고 의료사업을 배틀크리크에만 너무 집중시키지 말고 다른 도시들에서도 펼치라고 촉구했다(Lt 124, 125, 1902). 그러나 켈로그는 더 큰 위생병원을 재건축했다.
화재가 있기 직전에 그는 인간의 완전한 생리에 관하여 쓴 <살아 있는 성전(The Living Temple)>(Battle Creek, Mich.: Good Health Pub. Co., 1903)이라는 책의 원고를 완성했다. 화재 후 켈로그는 이 책을 판매하여 얻은 이익금을 기부하여 위생병원 재건축을 돕는 데 사용하도록 했다. 그 책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A. G. 대니얼스와 W. W, 프레스코트 등 몇몇 교회 지도자들은 책의 서두에 있는 범신론적인 부분을 보고 놀랐다. 이런 범신론적인 가르침은 엘렌 화잇이 기록한 가장 엄중한 경고 가운데 몇 가지를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교회가 맞닥뜨릴 “일련의 이단 가운데 알파[시작]”였다(Lt 265, 1903; 참조 Lt 232, 253, 1903). 1903년에 그녀는 계속하여 켈로그에게 그의 삶의 방향을 바꾸라고 촉구하는 정성어린 편지를 여러 통 썼다(Lt 55, 65, 80, 97, 107, 180, 181, 232, 245, 300, 301, 303, 1903). 그녀는 이전에 이미 했던 경고, 곧 켈로그의 가장 심각한 위험이 하나님보다 과학을 더 높이는 데 있다는 경고를 거듭했다(Lt 239, 1903). 얼마 동안 교회에서의 그의 미래는 저울에 달려 있었고, 엘렌 화잇은 그를 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켈로그가 짧게나마 자신의 위험한 상태를 인정했던 것 같다(Lt 257, 1903). 그러나 이때쯤 주사위가 던져진 것처럼 보였고, 그 후 그는 영원히 교회와 결별하였다. 엘렌 화잇은 그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도 아직 늦지 않았다고 호소했으나(Lt 360, 1906), 1906년 켈로그가 신앙에서 떠났다는 사실이 엘렌 화잇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분명해졌다(Lt 225b, 1906).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장시간의 면담을 거친 후, 1907년 11월 10일에 배틀크리크 태버내클 교회의 녹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제거되었을 때 그것은 아무에게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 후에도 엘렌 화잇이 그에게 계속하여 돌아오라고 호소했지만 그는 더 이상 그녀와 교신하지 않았다(Lt 100, 1911). 켈로그는 1943년 죽을 때까지 배틀크리크 위생병원을 경영하는 데 계속 활동하였다.
-Michael W. Camb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