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그리스도의 제사장 봉사는 성령의 직접적인 중보로 대체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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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은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에 대해서 거듭거듭 언급한다.
(1) 중보는 오직 한 분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딤전 2:5-6). 자기를 속전으로 주신 분만이 중보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2) 그리스도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히 8:6), “새 언약의 중보”(9:15; 12:24)로,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히 7:25). <재림교 성경주석>은 중보자의 의미와 자격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헬라어 메시테스(mesites), “조정자”, “중재자.” 두 사람 사이의 불화를 제거하거나 공동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중재하는 사람(참조 갈 3:19 주석). 이 단어가 신약에 여섯 번 나오는데, 이 중 네 번은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의 중보자이므로(딤전 2:5), 양자에게 그의 손을 얹을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이기에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대변해 말할 수 있으며, 사람이기에 사람들을 이해하며 그들을 위해 동정심을 가지고 하늘 아버지 앞에서 봉사할 수 있다.”(성경주석, 히 8:6).
1888년 이후에 완성된 <시대의 소망>에서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의 중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를 예표하던 희생 제사는 끝났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의 죄를 위하여 바쳐진 참된 희생 제물에 눈을 돌렸다. 지상의 제사장 직분은 끝났다. 그러나 우리는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를 바라본다.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12:24, 9:8-12).”(시대의 소망, 166).
“예수께서 중보자로서 그들을 위하여 탄원하고자 하나님 앞에 나타나실 것이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9:24, 7:25).”(각 시대의 대쟁투, 482).
(3) 십자가를 높이는 자들은 하늘 성소에서 중보하시는 그리스도를 높여야 한다.
“십자가를 전하는 기별자들은 깨어 기도함으로 자신들을 무장하여 항상 예수의 이름으로 일하며, 믿음과 용기로 전진해야 한다. 그들은, 구약 시대의 모든 희생 제도의 중심이요, 그의 속죄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사람들이 평화와 용서를 찾을 수 있는 그리스도를 하늘 성소에 계신 인간의 중보자로 높여야 한다.”(사도행적, 230).
(4) 그리스도는 창조 때로부터 중보자로 임명되었다.
“구속의 경륜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저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중보자의 직분에 임명되었으며 영원 전부터 우리들의 대리자요 담보(擔保)로 설정되셨다. 이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성을 쓰시도록 결정되었다.”(가려 뽑은 기별 제1권, 250).
(5) 그러면 성령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명한 후에 성령이 우리 안에서 어떤 사역을 하는지를 말한다. 성령은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며(16절),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헬라어 휘페렌튕카노]하신”다(26절),
이에 대하여 <재림교 성경주석>은 이렇게 설명한다.
“헬라어 휘페렌튕카노(huperentugchano). 신약에 유일하게 나오는 이중 합성 동사이다. 더 단순한 형태(엔튕카노)는 다섯 번 나오는데(참조 행 25:24; 롬 8:27, 34; 11:2; 히 7:25) 그 의미는 “~에 들르다”, “~를 만나다”, 따라서 “간청하다”이다. 묘사가 좀 더 생생한 단어인 휘페렌튕카노는 “~를 위하여, 대신하여”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도록 감동시키고 말할 것을 가르쳐 주며, 심지어 우리를 통해 말씀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참조 마 10:19, 20; 롬 8:15; 갈 4:6; 실물교훈, 147).”(성경주석, 롬 8:26).
이 본문은 성령의 중보를 가리키는 말로 휘페렌튕카노라는 말을 추가적으로 사용하여 성령께서 우리를 감동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것을 알려주고 그 기도를 하늘 성소에서 중보하시는 그리스도께 전달하는 역할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 절이 그런 사상을 뒷받침한다.
또한 <재림교 성경주석>은 이렇게 말한다.
“성령은 또 다른 “보혜사”(파라클레토스, 참조 요 14:16 주석)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언자”(파라클레토스)로서 아버지에게 하는 것처럼(요일 2:1),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탄원한다.”(성경주석, 롬 8:27).
로마서 8:34은 다시 그리스도의 중보를 말한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엔튕카노) 자시니라.”바울은 여기서 성령이 우리에게 탄원하고 또한 우리를 위해 하늘 성소에 계시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 탄원하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간구하신다는 뜻을 내비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늘 성소에서 진행되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봉사가 필요 없이 성령이 직접 중보하신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1888년 이후에 엘렌 화잇은 이런 뜻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힘입어 기도해야 한다. 이 말씀은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는 말씀의 뜻을 해석한 말이다. 이와 같은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즐겨 응답하신다.”(실물교훈, 147).
또한 그녀는 그리스도의 중보와 성령의 중보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우리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와 성령께서는 인간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중재하고 계시는데 성령께서는 태초로부터 흘리신 당신의 피를 바치는 그리스도처럼 우리들을 위하여 탄원하시지 않으시며 우리들의 심령에 역사하셔서 우리들의 기도와 참회를 자아내며 찬송과 감사를 불러일으키신다. 우리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감사의 표현은 성령께서 거룩하신 기억력으로 영혼의 심금을 울려 마음의 음악을 상기시킨 결과이다.
참된 신자가 드리는 종교적 의식, 기도, 찬송 및 죄의 자복은 분향처럼 하늘 성전으로 올라가기는 하나 그것들이 인간의 타락한 통로를 통과하므로 피로 정결함을 입지 않는 한 더러워져서 결코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여기시는 것이 되지 못한다. 흠 없는 순결성으로 드리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며 모든 것을 당신의 의로써 나타내시고 순결케 하시는 중보자가 없이는 하나님께 가납되지 못한다.”(가려 뽑은 기별 제1권, 344).
-임봉경
(1) 중보는 오직 한 분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딤전 2:5-6). 자기를 속전으로 주신 분만이 중보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2) 그리스도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히 8:6), “새 언약의 중보”(9:15; 12:24)로,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히 7:25). <재림교 성경주석>은 중보자의 의미와 자격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헬라어 메시테스(mesites), “조정자”, “중재자.” 두 사람 사이의 불화를 제거하거나 공동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중재하는 사람(참조 갈 3:19 주석). 이 단어가 신약에 여섯 번 나오는데, 이 중 네 번은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의 중보자이므로(딤전 2:5), 양자에게 그의 손을 얹을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이기에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대변해 말할 수 있으며, 사람이기에 사람들을 이해하며 그들을 위해 동정심을 가지고 하늘 아버지 앞에서 봉사할 수 있다.”(성경주석, 히 8:6).
1888년 이후에 완성된 <시대의 소망>에서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의 중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를 예표하던 희생 제사는 끝났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의 죄를 위하여 바쳐진 참된 희생 제물에 눈을 돌렸다. 지상의 제사장 직분은 끝났다. 그러나 우리는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를 바라본다.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12:24, 9:8-12).”(시대의 소망, 166).
“예수께서 중보자로서 그들을 위하여 탄원하고자 하나님 앞에 나타나실 것이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9:24, 7:25).”(각 시대의 대쟁투, 482).
(3) 십자가를 높이는 자들은 하늘 성소에서 중보하시는 그리스도를 높여야 한다.
“십자가를 전하는 기별자들은 깨어 기도함으로 자신들을 무장하여 항상 예수의 이름으로 일하며, 믿음과 용기로 전진해야 한다. 그들은, 구약 시대의 모든 희생 제도의 중심이요, 그의 속죄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사람들이 평화와 용서를 찾을 수 있는 그리스도를 하늘 성소에 계신 인간의 중보자로 높여야 한다.”(사도행적, 230).
(4) 그리스도는 창조 때로부터 중보자로 임명되었다.
“구속의 경륜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저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중보자의 직분에 임명되었으며 영원 전부터 우리들의 대리자요 담보(擔保)로 설정되셨다. 이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성을 쓰시도록 결정되었다.”(가려 뽑은 기별 제1권, 250).
(5) 그러면 성령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명한 후에 성령이 우리 안에서 어떤 사역을 하는지를 말한다. 성령은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며(16절),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헬라어 휘페렌튕카노]하신”다(26절),
이에 대하여 <재림교 성경주석>은 이렇게 설명한다.
“헬라어 휘페렌튕카노(huperentugchano). 신약에 유일하게 나오는 이중 합성 동사이다. 더 단순한 형태(엔튕카노)는 다섯 번 나오는데(참조 행 25:24; 롬 8:27, 34; 11:2; 히 7:25) 그 의미는 “~에 들르다”, “~를 만나다”, 따라서 “간청하다”이다. 묘사가 좀 더 생생한 단어인 휘페렌튕카노는 “~를 위하여, 대신하여”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도록 감동시키고 말할 것을 가르쳐 주며, 심지어 우리를 통해 말씀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참조 마 10:19, 20; 롬 8:15; 갈 4:6; 실물교훈, 147).”(성경주석, 롬 8:26).
이 본문은 성령의 중보를 가리키는 말로 휘페렌튕카노라는 말을 추가적으로 사용하여 성령께서 우리를 감동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것을 알려주고 그 기도를 하늘 성소에서 중보하시는 그리스도께 전달하는 역할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 절이 그런 사상을 뒷받침한다.
또한 <재림교 성경주석>은 이렇게 말한다.
“성령은 또 다른 “보혜사”(파라클레토스, 참조 요 14:16 주석)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언자”(파라클레토스)로서 아버지에게 하는 것처럼(요일 2:1),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탄원한다.”(성경주석, 롬 8:27).
로마서 8:34은 다시 그리스도의 중보를 말한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엔튕카노) 자시니라.”바울은 여기서 성령이 우리에게 탄원하고 또한 우리를 위해 하늘 성소에 계시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 탄원하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간구하신다는 뜻을 내비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늘 성소에서 진행되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봉사가 필요 없이 성령이 직접 중보하신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1888년 이후에 엘렌 화잇은 이런 뜻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힘입어 기도해야 한다. 이 말씀은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는 말씀의 뜻을 해석한 말이다. 이와 같은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즐겨 응답하신다.”(실물교훈, 147).
또한 그녀는 그리스도의 중보와 성령의 중보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우리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와 성령께서는 인간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중재하고 계시는데 성령께서는 태초로부터 흘리신 당신의 피를 바치는 그리스도처럼 우리들을 위하여 탄원하시지 않으시며 우리들의 심령에 역사하셔서 우리들의 기도와 참회를 자아내며 찬송과 감사를 불러일으키신다. 우리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감사의 표현은 성령께서 거룩하신 기억력으로 영혼의 심금을 울려 마음의 음악을 상기시킨 결과이다.
참된 신자가 드리는 종교적 의식, 기도, 찬송 및 죄의 자복은 분향처럼 하늘 성전으로 올라가기는 하나 그것들이 인간의 타락한 통로를 통과하므로 피로 정결함을 입지 않는 한 더러워져서 결코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여기시는 것이 되지 못한다. 흠 없는 순결성으로 드리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며 모든 것을 당신의 의로써 나타내시고 순결케 하시는 중보자가 없이는 하나님께 가납되지 못한다.”(가려 뽑은 기별 제1권, 344).
-임봉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