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에서 행운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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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에 갑자기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고 작년 말에 어머니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졸지에 고아가 되어 버리자 세상이 아득해졌다. 멀리서만 지켜보던 죽음이란 두 글자가 이렇게 피부에 와 닿은 적은 없었다. 원통하고 허망하고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가 마침내 나에게도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정녕 인생은 그렇게 끝이 나고 말 것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젊은 날에 이런 화두를 접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궁극적인 의문이자 심오한 질문 앞에 대답을 제시하려는 여러 종교적·철학적 접근법이 있을 것이나 가장 위대한 모범 답안을 일찌감치 찾게 된 행운을 가지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큰 성과였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교회에 출석하면서 접하게 된 성경은 놀랍게도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기에 인생의 큰 의미들을 깨닫게 해 주었다. 특히 죽음으로 끝나게 되는 인생의 허무함을 달래 주는 명약이었다. 인생의 고통은 또 다른 인생을 위한 대가임을 깨닫게 되었다. 구원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값이라면 맞을 것이다.
사망을 극복하는 능력
구원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라고 말한다. 구원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문제는 구원의 주체이다. 이렇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은 누구에게서 오는 것일까? 인생의 처음과 끝을 주관하시는 분, 창조주시며 만물을 주관하는 분이시며 인생을 사랑하는 분이시다. 그분의 이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생명 자체이신 분께서 영생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분을 알고 경험으로 확신하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쌍두마차
참 신기한 일은 만유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없으련만 죽음 가운데 처한 인간의 자유 선택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강제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어떤 선택을 하든 하나님께서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신다는 것이 신비롭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자유 선택을 존중하셨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시고 죄의 결과인 사망 가운데로 하나님이 대신 내몰리신 것은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이리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자 은혜이며 그 은혜에 반응하여 구원 행위에 응답하는 것이 믿음이다.
전적인 선물
나의 믿음은 능동형인가 수동형인가? 혹자는 이 질문에 의아해할 것이다. 젊은 날에 나의 믿음은 전적으로 능동형 믿음이었다. 나의 자유 의지로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에 구원을 이루었다고 말이다. 이런 신앙으로 일관된 개인 신앙 역사는 참으로 비참했다. 언제나 내가 중심이 되었고 내가 구원을 이루는 것이라고 여겼다. 구원이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인데 왜 내가 구원의 중심이 되느냐는 질문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믿음도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나의 믿음은 믿어지는 믿음이었다. 선물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면 단 하나의 소유자만 인정하게 된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라는 성경 말씀의 의미는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전제 조건
사람에게만 영이 있다는 말은 누구든지 종교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신이든지 보이는 신이든지 의존하는 본능을 타고났다는 말이다. 그것을 성경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라고 말하고 있다. 본능적으로 절대자를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우리를 위한 구원의 계획도 이미 마련되어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구원을 가로막는 죄와 죄의 결과들에 대하여 우선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 성경은 ‘회개’(막 1:15; 겔 18:30)와 ‘자복’(막 1:5; 시 32:5)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영이 말할 수 없는 탄식(롬 8:26)으로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도록 인도하시며(롬 2:4) 그 빈자리에 구원의 청사진이 새겨지므로 하나님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딛 2:11). 죄란 하나님과 격리되는 것이며 그에 따른 결과로 사망과 질병, 아픔과 고통, 슬픔과 좌절이 점철된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롬 5:12). 회개와 자복은 자기를 비우고 포기하는 자세를 말한다. 비울 뿐 아니라 그 자리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도록 말씀이신 예수를 언제나 바라보라는 것이다(고전 3:16; 히 12:2).
능력을 경험하라
구원이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이상을 포함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구원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삶도 중요하지 않은가? 현세에서 구원의 능력은 건강과 회복, 만족과 행복, 시련과 성공, 무병과 장수란 말들로 대변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믿고 영생을 얻은 자들은 대체로 건강하다. 육체의 질병이 빠르게 회복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지금도 내 몸 안에서는 수없이 많은 회복의 경험이 나타나고 있다. 또 어떤 형편에서도 만족하며 행복할 수 있다. 미래의 꿈과 소망이 삶의 활력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래도록 무병한 가운데 장수하고 있다. 스트레스를 믿음으로 해소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날마다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고 있다.
장애물
하나님이 설계하신 구원의 여정 속에 모두가 포함되기를 그분은 바라시지만 이를 거절하는 자가 있다.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이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섬멸하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을 방해하였고 이에 성공하지 못하자 믿는 자들을 속여 구원의 여정을 어지럽게 하였다. 질병, 시련, 시험, 사고, 사별, 이유가 없는 환란 등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더럽히려 하고 있다(행 14:22). 심지어 ‘자기’라는 자존감으로 자기를 비우지 못하게 하여 하나님을 받아들일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게 함으로 어떻게든 구원과 거리가 멀도록 택한 자라도 미혹하려 하고 있다(마 24:24).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어둠을 몰아내는 유일한 방법이 빛을 비추는 것이듯 죄가 가득한 우리의 마음에 빛이신 예수를 받아들이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통할 것 같지 않다(행 16:31).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
오직 나에겐 지금만 있을 뿐이다. 지금이 과거가 되고 미래가 되고 있다. 지금이 중요하다. 구원의 여정 속에 나는 어디쯤 있는 것일까? 왜 성경은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을 말하면서 ‘지금’(고후 6:2)을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군대 가는 아들을 보고 ‘언제 제대할까?’ 아득하게 생각되던 날이 선명하다. 하루하루가 더해져 어느덧 제대하는 아들을 보고 벌써 복무 기간을 마쳤냐며 놀랐던 일이 기억난다. 구원의 시간표가 아무리 길어진다 해도 혹 속히 마칠 것 같은 지구 종말의 시간이 다가온다 해도 우리에겐 오직 지금 즉 현재의 시간만 있을 뿐이다. 지금 은혜를 받고 지금 구원을 받자. 가장 큰 낭패는 구원의 자리에 내 자리가 없을 때가 아니겠는가! ‘분명 지금이란 시간이 있다는 것은 미래의 구원이란 시간이 있다는 게 아닐까?’ 자문해 보면서 너무도 분명한 구원의 함성을 지금 듣고 그 초청에 응하는 행운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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