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꿈이 공존하는 무덤 타지마할
페이지 정보
본문
인도에 가서 꼭 방문해야 하는 관광지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타지마할이라고 말할 것이다.
타지마할은 무굴 제국의 황제 샤 자한이 아이를 낳다가 죽은 자신의 부인 뭄타즈 마할을 위해 건축한 무덤이다. 인도 수도인 델리에서 자동차로 3시간 조금 넘게 달리면 아그라시에 도착하는데 그곳에 타지마할이 있다.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타지마할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할 정도로 많은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내가 타지마할을 방문한 것은 2019년 6월이었다. 사실 우리가 지내던 선교지는 관광지와는 많이 떨어진 지역이어서 제대로 된 관광을 거의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해 인도 남아시아지회에서 일하는 외국인 선교사 세미나가 델리에서 열렸고 세미나를 마치면서 다 함께 타지마할 관광을 하게 된 것이다. 인도에 온 지 9년 만에 말로만 듣던 타지마할을 방문한다는 사실에 나도 가족들도 모두 들떠 있었다.
새벽 4시 30분, 우리는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타지마할에 가기 위해 관광버스를 탔다. 브라질, 캐나다, 미국, 한국 등 여러 곳에서 모인 선교사들이 버스에 차례대로 앉았다. 세 시간 넘게 걸리는 먼 거리였지만 모두 들뜬 모습이었다. 우리는 버스가 타지마할에 도착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읽고 아이들을 돌보며 시간을 보냈다. 버스에는 할머니 한 분도 계셨는데 바로 인도 기독교 의과대학(Christian Medical College)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는 미국 의사 부부의 친정어머니셨다.
세미나 내내 휠체어에 앉아서 딸 부부와 함께 말없이 계시던 할머니는 버스에서도 아주 조용히 딸 옆에 앉아 있었다.
9시가 다 되어서야 우리는 타지마할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름 태양은 타지마할을 관광하는 모든 사람을 구워 버릴 기세로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고 그곳의 온도는 40도가 넘어가고 있었다. 타지마할에 도착하자 가이드는 타지마할 건물이 있는 곳은 이곳에서 좀 거리가 되기 때문에 오토릭샤(오토바이를 개조한 개방형 택시)를 타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삼삼오오 나뉘어 오토릭샤를 탔다. 남은 사람은 그 할머니와 할머니의 사위 의사 선생님이었다. 모두 할머니가 이 더위를 견딜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지만 의사 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휠체어가 오토릭샤에 들어가지 않을 것 같으니 저는 장모님을 모시고 휠체어를 밀고 갈게요.” 이 뜨거운 태양 아래서 휠체어를 밀고 15분을 걷겠다니. 의사 선생님에게도 할머니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남편은 그런 두 분을 위해 함께 걸어가겠다며 오토릭샤에서 내렸다. 아마 의사 선생님이 혼자 휠체어를 미는 것보다 자신이 함께 미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오토릭샤를 타고, 남편과 의사 선생님은 휠체어를 밀어서 타지마할에 도착했다.
우윳빛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타지마할은 태양 빛에 비쳐 반짝이고 있었다. 페르시아, 튀르키예, 인도에서 2만 명이 넘는 기술자들이 동원되어 22년에 걸쳐 건축했다는 타지마할 건물은 걸작 중의 걸작이었다. 수많은 방문객으로 인해 조금 복잡하긴 했지만 죽은 왕비를 잊지 못하는 왕의 애잔한 마음이 녹아 있는 것처럼 타지마할은 여전히 아름답고 경이로웠다. 입구를 지나 푸른 정원을 지나니 멀리서 본 거대한 무덤이 나왔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그런지 유적지 보존을 위해 모두 신발에 일회용 커버를 사용하도록 했다. 올라가는 길이 모두 계단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걸어서 올라갈 수 있었지만 할머니는 휠체어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올라갈 방법이 없어 보였다.
나는 이 더위에 휠체어를 타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대단하신 건데 그냥 그늘에서 쉬고 계시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할머니의 모습 때문이었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은 장모님을 안고 계단을 올라갔고 남편은 휠체어를 들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할머니 역시 굳은 결심을 한 듯 사위를 꼭 붙잡았다.
무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웅장하고 아름다운 대리석 건물에 연거푸 감탄사가 나왔다.
함께 온 인도 목사님은 샤 자한이 타지마할 공사가 마친 후 타지마할보다 더 아름다운 건물을 건축하지 못하도록 건축에 참여한 모든 사람의 손목을 잘랐다는 설화가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만큼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건물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에 취해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고 있을 때였다. 건물 뒤로 흐르는 강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의사 선생님 가족이 보였다. 사진 찍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의사 선생님과 밝은 얼굴을 하고 있는 아내 그리고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할머니는 딸 부부처럼 해맑은 표정을 보이지는 않았다. 조금은 힘들고 지쳐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레 의사 부부에게 물었다. “더운 날씨에 그래도 할머니가 잘 견디시네요. 정말 대단하셔요.”
그러자 의사 아내가 내게 말했다. “사실 저희 부부가 인도에서 선교사로 지낸 지 몇 년 되지 않아 어머니가 몸이 안 좋아지셨어요. 미국에 혼자 지내게 하실 수가 없어 인도로 모시게 되었지요. 그런데 어머니에게는 꿈이 하나 있었어요. 바로 타지마할을 방문하는 거였어요. 미국에 있을 때부터 꿈꿔 왔던 타지마할을 죽기 전에 꼭 보고 싶다고 하셔서 이렇게 뜨거운 날씨에도 타지마할 관광에 참여하시게 된 거랍니다.”
그랬다. 숨이 턱 막힐 정도의 뜨거운 더위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타지마할 구경을 하신 할머니의 간절했던 사연. 그것은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었던 할머니의 꿈이었던 것이다.
타지마할을 구경하고 나오는 길은 더 멀게 느껴졌다. 가지고 있던 물도 다 마셔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거칠게 숨을 쉴 때마다 뜨거운 열기만 몸속으로 들어오던 타는 듯한 오후.
의사 선생님은 다시 할머니를 휠체어에 모시고 출구로 걸어갔다. 모두 힘들어 말수가 줄어들었지만 쓰러질 것처럼 피곤해 보이던 할머니의 얼굴에는 평안함이 감돌았다. 평생 꿈꿔 오던 그녀의 소원이 성취되어서일까. 할머니는 그날의 뜨거운 공기조차도 기억하고 싶은 것처럼 타지마할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해 타지마할은 화려하고 웅장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타지마할은 평생 바라 왔던 꿈을 이룬 한 할머니의 모습으로 기억될 것만 같다.
- 정해옥 브런치 작가 -
- 이전글미룰 수 없는 일
- 다음글대법원도 인정한 ‘종교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