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도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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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애용하는 미용실이 있다. 2~3주에 한 번씩 머리를 손질하러 간다. 나이가 지긋한 미용사는 머리 손질을 하면서 이런저런 세상의 민심을 들려준다. 요즘은 손님들이 말세라는 말을 많이 한다고 한다. 누구나 그런 말을 한다고 한다. 하 수상한 세상이 아닌가! 사기가 하루에만 900건씩 일어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한 달이 아니라 하루에 말이다. 시간당 약 40건의 사기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전세 사기, 보이스 피싱, 사채 사기 등 온갖 속임수가 기승을 부린다. 최근에는 26세의 한 여성이 국가대표 펜싱 선수를 끼고 재벌 3세 행세를 하며 사기 행각을 벌여 나라를 뒤집어 놓았다.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사기를 칠 수 있는지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대한민국이 사기 공화국의 오명을 쓰고서도 사기는 날이 갈수록 지능화되고 악랄해져 간다. 사기를 당한 사람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나면 뒤에 남은 사람들의 삶은 지옥으로 변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세상은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세상은 날마다 폭력을 생중계하고 있다. 옛날 같으면 신문지상에서나 소식을 알 수 있었던 비참한 전쟁의 참상이 거의 실시간으로 개인들에게 알려지고 있다. 사람에 대한 불신이 깊어 가고 두려운 마음이 사람들을 위축시킨다. 마음은 병들어 간다. 정치와 경제는 말해 무엇하랴! 이런 세태를 보면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희망, 이것이 없으면 사람은 죽는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희망이 없다면 사람은 살아 나갈 수 없다.
희망의 이유와 근거
희망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어디에서 희망의 이유와 근거를 찾을 것인가?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기막힌 현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인터넷과 SNS가 발달하고 정보가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바람에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악의 민낯을 생생하고 실감나게 경험하고 있을 뿐이다. 옛 시절이 오늘날보다 좋았을까?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Good old days』(좋았던 옛날)라는 책이 있는데 과거가 오늘날보다 결코 낫지 않다는 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책이다. 페스트로 유럽 인구의 1/4이 사라지고, 600만 명의 유대인이 수용소와 가스실에서 죽어 나가고, 쓰레기와 범죄로 넘쳐났던 뉴욕의 1900년대 초의 모습은 비참했던 옛 삶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좀 더 오래전으로 가 볼 수도 있다. 고대의 죄악들을 기록하고 있는 성경에서 소돔과 고모라 도시의 타락은 밤길을 함부로 걸어 다닐 수도 없는 오늘날의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어떤 도시들의 판박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의 사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인간의 죄악상은 연쇄 살인과 토막 살인이 금세기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핵심은 무엇인가? 세상은 변했지만 사람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혜자들은 사람이 문제임을 일찍이 간파했다.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세상의 변화도 행복을 담보할 수 없다. 사람이 문제임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이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근본적인 변화의 비결
문제를 알지 못하면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사람이 문제임을 알기 때문에 사람을 고치는 노력들이 시도되어 왔다. 교육을 시키기도 한다. 약물을 사용하기도 한다. 훈련을 시키기도 한다. 이런 시도들도 어느 정도의 유익이 있다. 유익이 없다면 그런 시도들을 왜 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시도들이 근본적으로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시도들이 나 자신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면 해답이 없을까? 있다. 근본적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방법이 있다. 변화된 사람들이 있다. 한두 사람이 아니다. 예를 들어 보자. 성경에는 바울이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가 바울로 개명하기 전에 그의 이름은 사울이었다. 사울은 태생이 비천하거나 배경이 무지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태어나 오늘날로 말하면 일류 대학 출신이요 국회의원이었던 사람이다. 그런 훌륭한 배경의 사람이 살인자였고, 많은 교회를 파괴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다. 그런데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사랑의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는 이름을 바울로 바꾸고 눈물의 사도가 되었다. 바울은 ‘작다’라는 뜻이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한없이 작은 존재임을 깨달았다. 사울은 살기가 등등했었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런 그가 사랑의 사도가 되어 사랑에 대한 깊은 통찰을 고린도전서 13장에 기록해 놓았다. 교회를 사랑하고 사람을 깊이 사랑했던 바울은 자신이 전한 기별을 위하여 순교를 당했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순교를 당하면서까지 자신의 참변화를 증거 하였다. 그의 급격한 변화는 당시의 지도자들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어떻게 그런 근본적인 변화가 있을 수 있었을까? 그 변화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발생할 수 없는 것이다. 교육은 약간의 유익이 있을 수 있다. 약물도 얼마간의 효과가 있을 수 있다. 훈련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되면 인간은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막가파 강도들이 하나님을 믿고 깊이 회개하고 삶이 바뀌었다는 이야기,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찬미를 부르며 죽음의 길을 걸어갔다는 이야기는 죽음 앞에서 진실할 수밖에 없다는 면에서 더욱 빛이 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진정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한 개인의 변화가 하나님을 앎으로 일어났다면 그 변화는 가정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우리 자녀의 삶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사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지도자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개인과 사회와 나라가 이토록 혼란스럽고 무정하고 비정해지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신분석학자이며 심리학자인 칼 융은 “어떤 사람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정립되지 않으면 진정한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진단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정립이 근본적인 변화와 치유의 원인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이 시대의 충격적인 세태를 보면서도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야기할 수 있다. 진정한 희망은 하나님께 있다. 그 희망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울리는 꽹과리요 울림 없는 메아리에 불과하다. 진정한 희망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에 있다.
- 최상재 언어교육학 박사, 서울영어학원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