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역시 학생은 공부인 게 오히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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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만 7세가 되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합니다. 그러면 공식적으로 국가가 책임지는 무상 의무 공교육 제도에 들어가게 됩니다. 한 나라의 국민이자 학생으로서 국가가 제공하는 모든 교육 과정을 제대로 시작하는 첫걸음입니다. 그렇게 들어간 초등학교를 6년 다니고 이후로 중·고등학교를 6년 더 다니면 의무 교육은 끝입니다. 거기까지가 초중등교육법에 명시된 학교이고 이후로 가게 되는 대학은 고등교육법상 교육 기관으로 온전히 학생의 자율적 선택과 권리로 다니게 되는 학교입니다. 그 누구도 대학에 강제로 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요즘 분위기가 다 대학을 가는 게 당연한 것처럼 되어 버려서 마치 의무 교육 같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어쨌든 국가가 만든 교육 과정을 배우게 됩니다. 당장 국가가 만든 교과서가 있습니다.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국어와 수학을 배웁니다. 그전에 유치원 등에서는 정식 교과서가 없었는데 이제는 정식으로 교과서도 생기고 그에 따른 학습 내용도 있습니다. 한글을 배우고, 숫자를 배우고, 글을 읽고, 연산을 하면서(읽기, 쓰기, 셈하기로 흔히 ‘3R’이라고 합니다.) 학생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제 겨우 8살인 그저 어리기만 한 아이들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자기 이름 겨우 쓸 줄 아는 꼬마 아이를 데리고 1 더하기 1을 가르쳐야 하는 게, 이래서 에디슨이 학교에 가기를 싫어했구나 하고 이해도 됩니다. 그런데 다르게 생각하면 이것은 참 다행입니다. 공부라서 다행이고 공부라서 오히려 좋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넓고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눈 뜨고도 코 베이는 세상에서 이제 아이는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복잡하고 어지러워지고 무한 경쟁의 홍수 속과 같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평등하고 모두를 위한 복지를 갖춘다 해도 결국 자본주의는 경쟁에서 이겨 더 많은 파이를 얻는 것이 모든 사람의 목적이 됩니다. 그러면 똑같은 사람인데 누가 더 많은 파이를 가져야 합니까? 왜 누구는 산삼을 먹고 누구는 무를 먹어야 하나요? 그 정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하면 됩니다.
똑같은 학교에 들어와서 똑같은 선생님에게 똑같은 책으로 배워도 시험을 치르면 누구는 1등을 하고 누구는 꼴찌를 합니다. 한 줄 세우기라고 비판하고 교육이 경쟁이냐고 핏대를 세우지만 백 년이 넘게 흘러온 만고의 진리입니다. 그러면 똑같은 책을 똑같이 배웠다고 실력이 똑같아야 평등한 것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누구는 수업 시간에 열심히 듣고 집에서도 열심히 예습과 복습을 했고, 누구는 수업 시간에 흘려듣고 집에서는 가방을 팽개쳤습니다. 그러면 결과가 달라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닐까요? 열심히 한 학생이 나중에 좋은 결과를 얻어 파이를 많이 가져가고 게으름을 피운 학생은 그 대가로 적은 파이를 얻는 것이 불공평하고 비인간적일까요? 개미와 베짱이만 생각해도 금방 알 수 있어요. 쉽게 말해 너는 잘 생겼으니 더 많이 받고 너는 못 생겼으니 더 적게 받아라거나, 너는 키가 크니 더 많이 받고 너는 키가 작으니 더 적게 받아라보다는 훨씬 합리적이고 공평하지 않을까요?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한정된 파이를 손에 쥐는 방법이 공부인 것은 어찌 보면 참으로 다행이고 안전하며 공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개천에서 용도 나고 계층의 사다리도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받는 성적이 좋으면 원하는 직업을 얻고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학생의 학습 동기 유발에도 긍정적입니다. 내가 열심히 해서 결과가 좋으면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은 공부를 긍정적으로 보게 합니다. 물론 너무 어릴 때부터 그런 것에만 매몰되어 경쟁이 심한 스트레스가 되면 안 되니까 초등학교는 법적으로 시험을 없앴고 중학교에도 자유 학기제를 두어 공부만 하도록 강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진로 희망이란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고 싶고 어떤 것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희망이란 것이 대부분 중복됩니다. 언론에 자주 비쳐지는 학생들의 장래 희망을 보면 상위권에는 늘 전문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고소득 전문직이 되고 싶어 하고 그런 꿈을 꿉니다. 그런데 그런 전문직의 자리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경제의 원리로 희소성인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자리를 누가 차지해야 할까요? 돈이 많은 사람? 잘생긴 사람? 힘이 센 사람? 대부분의 그런 능력은 타고 난 것이거나 외부적 요인으로 된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공부는 다르죠. 여러 가지 많은 요인이 작용하겠지만 사실 공부는 머리가 나빠도 몸이 약해도 얼마든지 잘할 수 있습니다. 뻔한 이야기지만 학습에 의욕을 가지고 노력을 하면 누구나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모두가 다 압니다. 단지 다른 핑계와 원인과 유혹 때문에 그만큼 못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모든 핑계와 원인과 유혹을 이기고 열심히 학습에 매진한 사람은 당연히 그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어린이의 친구이자 세상 누구보다 어린이의 행복을 바랐던 진정한 어린이 사랑꾼인 소파 방정환 선생은 죽음을 예감하자 가족 모두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외동아들에게 딱 한마디를 합니다. 어린이만 생각하는 그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인 외동아들에게 뭐라고 했을까요? 늘 어린이는 천사라고 외친 사람인데 아들에게 천사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사랑한다고 했을까요? 미안하다고? 아닙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정답은 “공부 잘하라.”였습니다. 어린이의 친구로 어린이의 행복만 생각했던 방정환 선생도 알았던 것입니다. 어린이는 결국 공부를 해야 하고 그것도 잘해야 한다는 것을.
결국 또 공부야?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하겠지만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게 아니고 공부라서 ‘오히려 좋아’임을.
- 김민중 대구교육대학교 연구 파견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