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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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스케치
길고 길었던 추운 겨울의 터널을 막 벗어났다.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편 이들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도심의 거리를 바삐 오간다. 따스한 햇살이 두 뺨에 닿자 환한 미소가 금세 얼굴 가득 퍼진다. 훈훈한 봄바람이 불어오니 두꺼운 겨울 외투를 벗어 던진다. 완연한 봄기운이 온 세상을 뒤덮는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땅이 녹아 나날이 물러진다. 논둑과 밭둑에는 파릇파릇 새싹이 경쟁하듯 돋아난다. 죽은 것만 같았던 마르고 앙상한 가지도 점점 촉촉해지더니 이내 물이 오르기 시작한다. 작은 개울가에서는 한층 얇아진 얼음장 밑으로 수정같이 맑은 시냇물이 돌돌 흐른다. 작은 새들도 활기찬 날갯짓으로 창공을 힘차게 날아다니며 봄을 깨운다. 시간이 멈춰 버린 듯했던 세상이 도로 생명력으로 충만해져 다시 새 생명을 얻은 것처럼 힘찬 부활의 봄을 노래하고 있다. 이처럼 자연은 우리에게 말없이 희망과 용기를 준다. 지난 3년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사람의 마음이 무너졌다. 감당하기 힘들었던 삶의 무게에 짓눌려 마음은 우울했고, 예상치 못한 시련과 고난으로 인해 사는 게 버거웠다. 그러나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 곁으로 새봄이 다시 찾아왔다. 온 세상이 다시 활기를 되찾고 생명의 기운을 되찾은 것처럼 이제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었던 일들을 뒤로하고 희망으로 가득한 봄을 맞이하기를 바란다.
중학교 1학년과 대학교 1학년의 만남
요즘처럼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필요한 때에 온갖 시련과 고난을 이겨 내고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이자 미국 백악관 국가 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지낸 강영우 박사(1944~2012)의 이야기와 그의 아내 석은옥 씨의 고백에 귀기울여 보자. 그녀가 대학교 1학년이었을 때 그녀는 맹학교 중등부 학생을 돕는 프로그램에 봉사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중학교 1학년 학생이던 강영우를 처음 만났다. 누군가 그를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오라고 했을 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제가 다녀오겠습니다.”라며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녀는 어린 남학생의 손을 덥석 잡고 광화문 네거리로 나섰다. 그때 처음으로 “저는 숙대 영문과 1학년 석은옥이에요.”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 순간부터 그녀는 한평생 그의 곁에서 삶의 지팡이가 되었다고 했다. 강영우는 1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5살 때 축구를 하다가 눈에 축구공을 맞아 실명했다. 이 사고로 아들이 실명하자 그 충격으로 어머니마저 곧 세상을 떠났다. 졸지에 고아가 된 삼 남매는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장애인 재활원으로, 여동생과 남동생은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그에게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그녀는 약 1년 동안 주말마다 맹학교 기숙사로 찾아가 그에게 책을 읽어 주고, 이곳저곳 안내해 주는 봉사 활동을 했다. 그러다 보니 정이 들어 그를 동생으로 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자란 그녀는 평소 ‘동생이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 잘됐다 싶어 그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그에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지 않으니 그녀는 누나로서 그를 대신해서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았다고 했다. 학교에서 소풍을 갈 때면 도시락을 싸 들고 따라가야 했고, 빨래와 장보기부터 대학 진학 준비에 이르기까지 온갖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이렇게 그들은 누나와 동생으로 6년을 함께했다.
시련과 도전
당시에는 시각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매우 심해서 버스를 타는 일도 쉽지 않았고, 가게에 들러도 ‘아침부터 재수 없다’며 ‘오후에 오라’고 했다.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고 할 때도 ‘구석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의 삶 그리고 장애인과 함께 생활하는 일이 녹록지않았다. 그러다 1967년 시각장애인 교육과 재활 공부를 위해 그녀는 잠시 그와 이별을 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홀로 남겨진 강영우는 그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누나를 보내고 불안감과 부담을 안고 대입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8년 그는 연세대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그동안의 짧은 이별이 두 사람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고 더 이상 누나 동생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되었다. 외동딸을 둔 홀어머니와 집안 친지 그리고 친구들도 이들의 결혼을 만류했지만 결국 딸의 고집을 꺾지 못했고 이 둘은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은 1972년 미국 LA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여러 해 동안 그의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주신 양부모님을 만나 일주일을 보내고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하루는 남편을 강의실에 들여보낸 뒤 도서관에서 책을 녹음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강의가 끝난 지 30분 이상 지난 시간이었다. 온힘을 다해 강의실로 뛰어가 보니 그는 불안한 모습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여보!”하고 부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디 갔다가 이제 왔어?”라며 화를 버럭 냈다. 그녀는 미안하기도 했지만 항상 잘하다가 한 번 실수했는데 그것도 이해하지 못하나 싶어 섭섭한 마음에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말다툼을 벌였다고 했다. 몸이 아플 겨를도 없이 매일 동분서주하는 고달프고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수업료는 문제가 없었는데 생활비로 나오던 장학금이 만료가 되었다. 닥치는 대로 막일이라도 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에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온갖 편견에 맞서야 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은 한없이 높아서 그 벽 앞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절망의 나날이었다. 게다가 병원 청소원으로 겨우 취업이 되었는데 이민국에서 노동 허가가 나지않아 그 일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
다행히도 친절한 이웃의 도움으로 드디어 1976년 강영우는 각고의 노력 끝에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시각장애인의 아내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힘에 겨운 내조를 했지만 큰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도 고대하던 박사 학위를 받고도 고국에 돌아가 대학 강단에 설 기회를 얻지 못해 무직자로 1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기적적으로 그가 미국 인디애나 주정부 교육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30년 동안 강영우 박사는 주정부 교육청에서 근무하며 저녁에는 일리노이 주립대대학원에 출강하기도 했다. 부시 대통령 재임 당시 그는 대통령 직속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에 임명되어 장애인의 권익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다했다. 현재 그의 큰아들은 듀크대 대학병원에서 안과의사로 일하고 있으며, 산부인과 의사인 아내와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살고 있다. 작은아들은 연방 상원 법사위원회에서 입법 활동을 보좌하는 변호사로 근무하고 있으며, 아내 역시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석은옥! 그녀는 강영우 박사의 지팡이가 되어 시련과 역경을 이겨 내고 헌신적인 아내로, 두 아들의 어머니로 살았다. 그녀가 남긴 삶의 발자취는 꺾이지 않은 사랑의 힘이 남긴 흔적이다. 강 박사는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 등과 같은 책을 남겼다. 책 제목만 보아도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준다. 사고로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그의 눈에는 절망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련과 역경을 이겨 낸 그의 삶을 돌아보며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라고 고백했다. 요즘처럼 여러 악재로 인해 주변 환경이 어수선하고 절망스러운 때에 이들이 살아온 삶의 역정이 거울이 되어 많은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로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 곁에 성큼 봄이 다가왔지만 여전히 지독한 인생의 혹한기를 보내고 있는 이들이 강영우 박사와 석은옥 여사의 삶의 여정을 지켜보며 봄날의 햇살같이 따스한 온기를 받아 곧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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