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에서 광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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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사미디어
등록일 2023.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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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은 도시 중심부의 인위적인 공간이다. 그곳은 공동체의 심장과 같아 민심의 박동을 느낄 수 있다. 사방에서 모인 사람들은 한목소리를 내며 단합된 힘을 표출하기도 하고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어 격렬한 대립의 장이 되기도 한다. 여러 개인이 모여 군중을 이루니 거대한 에너지로 변화한다. 화산의 분화구와 같은 그곳의 진동은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서울의 여의도 광장, 평양의 김일성 광장,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이 그 예이다. 한국의 근대사 또한 그 광장의 주연자들로 인해 꼴 지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래에는 촛불과 태극기로 상징되는 광화문 인파가 한국의 정치 기류를 반영한다.반대로 광야는 비인위적인 자연 공간이다. 기후와 지질이 빚어낸 광활한 공간이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반듯한 나무 한 그루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극한의 더위와 추위를 견디는 강인한 들풀만이 억척스럽게 메마른 땅의 여기저기에 생존한다. 건조한 그곳은 주로 회색과 갈색이 바탕을 이룬다. 온대 지역에서는 사계절이 뚜렷하며, 산과 강이 많은 한반도에는 평야는 있어도 광야는 없다. 북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 미국 서남부, 호주의 내륙 그리고 남미 서부 지역의 상당 부분이 황막한 광야를 형성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도시를 뒤로하고 광야로 나간다. 사람의 소리도 짐승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의 공간에서 자신과 대화하거나 자연이나 신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이렇다 할 생산성이 없는 광야가 인간 역사에 미친 영향은 미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류 정신사에서 광야는 무시할 수 없는 곳이다. 세계 삼대 유일신 종교(monotheistic religion)가 중동의 광야를 배경으로 시작되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이들 종교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인류 문명사 특히 서양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 점에서 나일강이나 메소포타미아의 두 강 못지않은 영향력을 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이버 광장
이제 광장은 우리 손안에 있다. 현대 첨단 과학 기술의 산물이다. 그 편리성과 유용성 때문에 그것 없이는 현대의 도시인으로 생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 작은 사이버 광장에 하루에 수천수만 명이 드나든다. 대부분은 이런 광장을 여러 개 가지고 있다. 그곳에서 남의 얘기를 듣고 대꾸도 하고 그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퍼 나르기도 한다. 삶에 필요한 정보와 지식뿐 아니라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소중한 지혜도 찾을 수 있다. 동시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사이버 광장의 선동력과 동원력은 대단하다. 미국 선거 결과를 부정하는 폭도들의 워싱턴 국회의사당 진입과 비슷한 이유로 브라질리아에 있는 대통령궁, 대법원, 국회의사당 동시 진입 사건은 대표적인 사이버 광장의 선동력과 동원력의 사례다. 시위를 비롯해 크고 작은 단체 행동은 사이버 광장에서 시작되어 거리 행동으로 발전한다. 이제는 유익한 일도 유해한 일도 사이버 광장을 통해 이루어진다.
모든 것에 지나치면 해가 된다. 사이버 중독이 그중 하나다.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그곳에 쏟아부어 자기를 상실할 정도다. 광장에서 분리해 객관적으로 자기를 성찰하고 반성해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남의 얘기와 남의 평판에 함몰되어 스스로 판단하고 비판할 능력을 상실한다. 자아를 상실해 허탈감에 휩싸일 뿐 아니라 우울증에 빠진다. 여기저기서 사이버 광장의 위험을 알리는 경고음이 들린다. 뉴욕에 루다이트 청소년들(Luddite Kids)이 나타났다. 사회관계망에 빠져 방향감을 상실해 허우적거리던 청소년들이 스마트폰을 포기한 것이다. 자유 시간 대부분을 스마트폰에 머리를 박고 살던 저들이 따로 모여 대화와 토론으로 시간을 보낸다.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감정과 태도를 피부로 느끼고 즉흥적이고 솔직하게 각자의 생각을 말로 표현한다. 아주 진지하고 열정적이다. 저들은 더 이상 조회 수나 타인의 댓글에 연연하지 않는다. 산업 혁명이 초래한 기계 문명에 저항한 18세기의 영국 루다이트처럼 그저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그런 사람의 수가 늘어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비슷한 이유로 한 세대 전에 쓰던 피처폰을 찾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전화, 문자 메시지, 음악 정도로 만족해한다.
또 다른 현상은 많은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영감받기를 갈망한다는 것이다. 사회관계망 안에서는 연령대나 사회적 배경이 비슷한 멤버들이 주를 이루다 보니 오고 가는 대화 내용이 흥미롭기는 하나 멤버들의 생각이나 사상을 심화시키거나 고양시키지 못한다. 도토리 키 재기에 싫증 난 젊은이들이 현재의 자기를 초월할 수 있는 사상과 영감을 찾고 있다.
하버드에서 공부한 두 젊은이가 미 전국 대도시 근처 자연환경에 작은 케빈을 설치하고 도시인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회사(Getaway Company)를 운영하고 있다. 그곳에서는 18세기나 19세기의 미국 농촌의 삶을 연상케 할 정도로 최소한의 편의만 제공한다. 비록 일시적이지만 목적은 각종 디지털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 자신과 자연에 다시 연결되는 것이다(Disconnect to reconnect). 한국인의 정신 건강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이시형 박사가 비슷한 시설을 강원도 홍천에 만들었는데 바로 힐리언스(Healiens) 선마을이다. 주목적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이나마 디지털 단식을 통해 정신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다.
영혼의 광야
스스로 혼자 있기를 원하면 고독(solitude)이고 그렇지 않음에도 혼자 있게 되는 것을 외로움(loneliness)이라고 한다. 시인이나 수도자는 고독을 추구하나 나그네는 외로움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형태는 달라도 광장과 광야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삶에는 내면성과 사회성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광장을 떠나 광야로 나아가 자신의 삶을 점검해 보는 일은 건전한 삶을 위해 중요하다. 홀로 들판이나 숲속을 걸으며 자신과의 대화를 시도해 보기,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제주도 올레길 여행은 못하더라도 혼자만의 시간 가져 보기, 독서하거나 음악을 들으며 자신의 삶 성찰해 보기, 혼자 명상하며 신 앞에서 스스로를 점검해 보기, 인생의 궁극적인 질문에 직면해 보기 등. 광장의 도전적 삶을 헤쳐 나갈 내적 에너지를 광야에서 충전받는 것이다.
애굽에서 400년 이상 뿌리내리며 대대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기 위해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 치는 목자로 인내와 겸손을 배우지 못했다면 그는 40년간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버텨 낼 수 없었을지 모른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 예수는 4년 미만의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40일을 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도와 명상으로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북쪽 갈릴리 근처 나사렛에서의 조용한 삶 자체가 광야에서의 준비나 다름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예수의 길을 예비한 침례 요한도 광야의 사람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로마 제국을 기독교화 하는 일에 선교적 기초를 놓은 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는 길 위에서 예수의 음성을 들은 후 무려 3년 동안 아라비아 광야에서 영적인 준비를 하였다. 그곳에서 기도와 명상 그리고 말씀을 연구하며 그의 선교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음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6대 1의 법칙
유대인은 수천 년간 7일을 주기로 일터와 예배하는 곳을 엄격히 구별했다. 6일간은 힘써 농사도 짓고 장사하다가 제칠일은 평소의 모든 것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것이다. 저들이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를 거치는 동안 6일간 매일 내리던 만나가 제칠일에는 내리지 않음을 보고 하늘의 교훈을 깨달았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광장과 광야의 비율을 최소 6 대 1로 정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너무 중요하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돌비에 네 번째로 적어 오늘 우리에게 전해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광장과 광야의 비율을 혹시 100 대 1로 정해 놓고 사는 것은 아닐까?
- 윤원길 라시에라 대학교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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