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 요나의 이야기는 구약 성경에서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이다. 이 내용을 아이들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지만 히브리 본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요나서는 큰 물고기에게 삼켜진 고집불통 선지자의 이야기 그 이상이다. 두 가지 쟁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고 둘째는 요나서 3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예언에 담긴 의미와 성취에 관한 것이다.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책의 첫 부분에서는 요나를 아밋대의 아들로 소개한다. 열왕기하 14장 25절로 미루어 요나는 기원전 8세기 초반에 여로보암 2세의 궁정에서 활동한 선지자이다.1 연대상으로 요나서는 아시리아(앗수르)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국면을 맞았을 때 기록됐다. 아시리아에서 니느웨는 큰 도시였다. 기원전 8세기 초반에 아시리아는 내외적으로 몇 가지 문제를 만났다. 이 시기에 아시리아 왕들은 북쪽 경계에 관심을 두고 우라르투 왕국과 싸움을 벌였다. 우라르투는 구약에서 “아라랏 땅”(왕상19:37; 사 37:38)으로 알려진 곳으로 오늘날의 아르메니아 및 그와 인접한 튀르키예 동부, 이란 북서부 그리고 이라크 북부 일부에 해당한다. 우라르트 왕국에 관한 얼마 안 되는 정보는 주로 아시리아 기록 보관소와 왕실 비문에 의존하는데 이들 기록에 따르면 우라르트는 기원전 9~6세기에 이 지역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가 살았던 기원전 8세기 초반의 아시리아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다. 우라르트의 왕 사르두리 2세는 이 약점을 이용해 아시리아 왕 아슈르-니라리 5세(754~746 B.C.)를 물리쳤다. 강국 아시리아가 힘을 잃은 것이다.
아시리아에 영향을 끼친 또 다른 문제가 이 시기에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필경사들은 정확히 여로보암 2세와 요나가 살았던 때인 기원전 763년 7월 15일에 일식(日蝕) 현상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학자들은 일식을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경고로 여겼다. ‘에누마 아누 엔릴’이라는 쐐기문자 명판에는 이러한 천체 징조들의 목록이 광범위하게 집대성 되어 있다. 그중 일식에 관한 해석은 매우 어두운 문체로 묘사 되었고 분명 아시리아인들을 놀라게 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왕이 지위를 빼앗기고 죽임당할 것이며 천한 자가 보좌를 차지할 것이다.” “왕은 죽을 것이고 하늘에서 내린 비로 땅에 홍수가 일어날 것이다.” “신이 왕을 쳐서 불이 땅을 삼킬 것이다.”, “성벽이 파괴될 것이다.” 와 같은 식이다. 한마디로 아시리아인들은 극심한 불안에 시달렸고 언제라도 재앙이 일어날 수 있다고 예상했다.
니느웨에 가서 전하라고 하나님이 요나에게 주신 명령을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하나님은 역사와 우주를 다스리시며 자기 백성뿐 아니라 ‘세상’의 구원에 관심을 기울이신다. 그분은 고대 근동의 지역 정세와 아시리아인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그 당시의 천체 현상을 이용해 그들이 요나의 설교에 귀 기울이도록 마음을 준비시키셨다. 말할 것도 없이 사람들은 요나의 기별을 받아들였고 이 사실을 요나서 3장에 확인할 수 있다.
요나의 예언에 담긴 이중적 의미
요나서 3장에 묘사된 사건은 분명하다. 요나가 물고기의 배 속에 들어갔다 나온 뒤 하나님은 그에게 니느웨에 가서 자신의 기별을 전하라고 다시 명하셨다(욘 3:1~2). 이번에는 요나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고 니느웨 거민에게 하나님의 예언을 전했다(3~4절). 적어도 성경의 기록을 보면 예언의 메시지는 간결하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 결과적으로 니느웨 거민은 하나님을 믿었고니느웨의 통치자는 백성과 함께 회개를 의미하는 몇 가지 의식(금식, 베옷)을 행동으로 보였다(5~9절). 니느웨 백성이 악행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성읍에 형벌을 가하려던 마음을 바꾸셨다. 하나님의 변심과 ‘성취되지 못한’ 요나의 예언이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예레미야 18장 7~10절과 같은 성경 본문을 사용해 하나님의 결정을 설명한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기별을 대하는 청중의 행동과 반응에 따라 달라지는 조건적인 예언이 있다고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다. 이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요나의 예언에 결실이 없었다고 속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니느웨에 전한 요나의 기별은 간결했지만 우리가 흔히 인식하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무너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 ‘하파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멸망과 심판을 묘사할 때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다(창 19:21~25; 신29:22).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멸망을 하나님이 이두 도성에 행하신 것(하파크)에 빗대고 있다(사 13:19~20; 렘50:39~40; 49:17~18). 스바냐 역시 모압이 당할 형벌에 대해 소돔과 고모라에 행하신 하나님의 행위를 적용하고 있다(습2:9). 그런데 ‘하파크’는 분명 멸망을 뜻하지만, 또 다른 의미로도 사용된다. 같은 동사가 나일강을 피로 ‘변하게’(하파크) 하신 하나님의 행위(출 7:17, 20)와 해를 어둠으로 ‘바꾸신’ 행위(욜 2:31)를 설명할 때도 사용되고 있다. 또 호세아 11장 8절에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심판에서 동정으로 바뀌는 하나님의 심정을 진술할 때도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하파크’는 사무엘상 10장 6, 9절에서 사울왕의 행동 변화를 설명할 때도 사용된다. 이 구절에서 새로 지명된 이스라엘의 왕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변하여’ 딴사람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이 요나에게 주신 예언은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예언은 도성이 파괴될 가능성을 가리킴과 동시에 니느웨가 바뀔(변할) 가능성도 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실패한’ 예언이라고 보아야 할까? 그 대답은 누구에게 묻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하나님과 나눈 대화에서 나타나는 요나의 마음가짐을 고려한다면 분명 요나는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는 ‘하파크’의 첫 번째 의미, 즉 멸망을 기대했기 때문이다(욘 4:1~5).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라고 대답하셨을 것이다. ‘하파크’의 두 번째 의미처럼 니느웨 거민은 자신들의 행동을 바꾸었고 악행에서 돌아섰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요나서를 풀이하면서 하나님은 역사를 다스리는 분이시며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세상의 사건들도 자기 목적에 따라 사용하실 수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더욱이 말세의 예언을 논할 때 우리는 그 성취에 관하여 독단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히려 바람직한 자세는 지적인 겸양과 영적인 겸손이다. 요나처럼 어떤 이들은 마지막 날 사건들이 특정 방식으로 전개되리라고 기대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허를 찌르는 방식으로 예언을 이루실 수도 있다. 하나님은이 예언들이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다. 비록 우리가 깜짝 놀랄
만큼 예기치 못한 방식이라고 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