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명사를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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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이 지나도 동상으로 우뚝 서 있는 인물들이 있는가 하면 무덤의 흙도 마르기 전에 성난 군중이 한때의 지도자를 밧줄로 끌어내리는 일도 있다. 지금 미국에서는 과거에 백인 우월주의를 옹호하고 흑인 노예 해방을 반대했던 남부 인물의 동상을 제거하는 일이 여러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다. 일종의 기억 말살 행위이다. 반대로 히틀러나 스탈린처럼 잔인했던 독재자는 후대들의 반면교사로 삼기 위해 거듭거듭 언급되기도 한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전사한 무명용사들은 국가와 국민이 대대로 기리며 추모한다. 어느 나라 국립묘지에서도 가장 추앙받는 곳은 무명용사비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죽으면 그 이름이 곧 잊혀진다. 서양식 잔디밭 형태의 공동묘지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똑같은 크기의 직사각형 대리석판이 있고 거기에는 망자(亡者)의 이름과 생년 사망 월일이 적혀 있다. 평평한 넓은 묘지의 석판은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절대로 필요한 안내판이다. 그러나 조상에 대한 개념이 점점 약해지는 요즘 고인을 기억하기 위해 10년 20년 후에도 묘지를 찾는 경우는 아주 드물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돌판에 새겨진 이름은 잊혀지고 그 안의 문자도 풍화 작용으로 희미해져 간다.
현저한 고유명사들
자신의 시대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거나 중요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의 이름은 오래 기억된다. 미국에서는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프랭클린 루스벨트, 토머스 에디슨, 앤드루 카네기, 존 록펠러, 헨리 포드, 아인슈타인, 마틴 루서 킹 목사 같은 유명인의 이름이 대대로 회자된다. 주, 도시, 각급 학교, 병원, 기업, 예술 공연장, 비행장, 재단, 연구소 등이 저들의 이름을 걸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도로가 유명인의 이름을 쓰고 있다. 저들의 정치적·사회적 기여가 크기에 후대의 미국인들이 계속 저들을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특히 지폐나 동전 혹은 우표에 선정된 인물은 최고의 반열에 속한다. 미국의 세 대통령은 지폐와 동전에 그 얼굴이 새겨져 있다. 워싱턴 초대 대통령은 지폐에서 가장 낮은 1달러와 25센트에, 삼 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2달러 지폐와 5센트에, 노예를 해방시킨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5달러 지폐와 1센트 동전에 얼굴이 새겨져 있다. 저들의 생일을 국가 공휴일로 기념하는 워싱턴과 링컨은 미국에서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사후 지명도가 높다. 한참 후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생일도 공휴일이 되었다. 한때 세계 자동차 업계를 주도했던 포드(Ford) 회사는 그 창업자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포드 가족의 업적을 기린다. 그 점에서 세계적 민간 여객기 제작사인 보잉(Boeing)도 마찬가지다.
중세 이후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세를 탄 이름은 아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알프레드 노벨이 아닐까 싶다. 미지의 대륙을 발견해 구세계와 신세계를 연결한 콜럼버스는 세계화의 원조라 칭할 만한 인물이다. 그래서 미주(북 남미)에서는 그의 업적을 다양하게 기리고 있다. 남미 굴지의 나라 콜롬비아는 나라 이름을 그에게서 땄고 아비리그 대학인 컬럼비아 대학도 같은 예이다. 미국 정부는 매년 10월 둘째 월요일을(콜럼버스는 1492년 10월 12일에 서인도 제도에 상륙) 콜럼버스날로 정하고 공휴일로 지킨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 광산, 운하, 철도 건설 등에 사용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동시에 그의 발명품이 전쟁 무기로 이용되면서 대량 살상이 가능해졌다. 이에 마음 아파했던 노벨은 자기 재산으로 노벨상을 제정해 매년 문학, 경제, 과학(물리, 화학, 생리), 평화 분야에 크게 공헌한 개인이나 단체에게 상을 주고 있다. 세계적으로 뛰어난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이 바라는 상이 노벨상이다.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에서 후대가 기리고 싶은 인물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것도 마지막 왕조 이씨 조선에 집중된 느낌이다. 광화문 광장의 거대한 두 동상이 이를 뒷받침한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 및 여러 가지 문화적 기여 때문일 것이고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했기 때문이다. 특히 세종대왕은 도시, 대학, 군함, 연구소 등에 명명됨으로 어떤 역사적 인물보다 돋보인다. 대조적으로 북한은 초대 지도자의 이름을 널리 사용하고 있다. 김일성 대학, 김일성 광장 이외에도 그의 동상이 북한 전역에 세워져 있다.
사후에 이름이 남게 되는 것은 대체로 두 가지로 결정된다. 한 개인이 살아 있을 때 자기 이름으로 어떤 조직체나 상을 정하는 것이다. 한때 세계 제일의 부자였던 빌 게이츠 부부는 그들의 재산 상당 부분으로 세계 최대의 사회 공익 재단을 만들어 인류의 복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반대로 링컨 대통령은 임기 중에 암살을 당해 가족을 위한 유언장도 제대로 준비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후대가 정치가로서의 그의 위대함을 기리기 위해 다양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보통을 고유로
과일 중에 사과만큼 대중적인 것도 흔치 않다. 영어권에 태어난 아기들이 마마 대디 다음으로 제일 먼저 배우는 단어 중 하나가 A로 시작하는 애플이다. 그런데 그 흔한 애플이 한 입 베어 먹힌 사과로 상표가 될 때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고유명사가 되는 것이다. 그 상표가 대표하는 애플 기업의 가치는(2022년 1월에 3조 달러) 세계 1위로 그 당시 한국 GDP의 1.8배였고 삼성의 7.6배였다. 애플 한 회사의 경제 규모가 한때 프랑스, 이탈리아, 브라질, 캐나다 이런 나라보다 앞섰다. 그런 애플이 스티브 잡스라는 시리아 유학생의 아들로 태어나 백인 부부에 입양된 독특한 창업자의 삶과 연결되면 그 사과는 많은 것을 상기시킨다. 죄와 벌은 일상적인 종교적 혹은 법적 용어이다. 그러나 죄와 벌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라는 러시아 작가와 연결되면 그것은 불후의 명작으로 고유명사가 되는 것이다. 그 같은 이유로 ‘전쟁과 평화’라는 대조적인 단어도 레오 톨스토이라는 러시아 문호와 연결되면 기념비적 문학 작품으로 고유명사가 되는 것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지만 그 예술은 언제나 예술가와 연상된다.
대학 교수였던 나는 그저 평범한 중산층으로 살았기에 내가 남길 것은 지식 분야일 수밖에 없다. 내가 쓴 책들이 영어권 나라의 도서관에(Harvard, Yale, Princeton, Stanford, UC Berkley, UCLA* 등) 종이 책이나 전자 책으로 지식 확장에 도움이 된다면 작은 기여라 할 수 있겠다.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 책들은 내 이름을 지닌 채 도서관에 남아 있을 것이다. 언젠가 『시조』에 올린 수십 편의 글도 서울미래유산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은 70에서 90세를 사는데 어떤 형태로든 사후에도 남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름답게 우리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다. 종종 남이 알지 못하게 익명으로 사회에 공헌하는 분들도 있다. 얼마 전에 이름을 알리지 않은 어떤 분이 고려대학교에 630억 원을(개인 기부 역사상 최고액)기부했다고 한다. 의도가 중요한 것이지 이름을 남기느냐 아니냐는 부차적인 것이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영향력을 발휘한 고유명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일 것이다. 유럽을 위시해 세계 각처에 저들을 기리는 고유명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 외에 St. Peter, St. Paul, St. John, St. James, St. Luke 등 그 이름을 통해 상기되는 그들의 삶과 가르침은 지난 2,000년 동안 세상을 꾸준히 변화시켜 오고 있다.
- 윤원길 라시에라 대학교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