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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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부터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일 년 내내 감귤, 한라봉, 천혜향, 레드향, 황금향 등등 어린 시절부터 무척이나 좋아하는 귤 종류를 가까이에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즐겁다. 섬 지역 주민들의 대체적인 특성인 순수한 면들이 다분히 발견되지만 75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아픈 역사로 말미암아 생겨난 제주 토박이 주민들의 정서가 생활 속에서 여러 모양으로 드러날 때면 애잔한 감정을 감출 수 없다. 작년 10월 어느 주말 모임에서 ‘우리’라는 말을 나는 별 뜻 없이 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사용했을 뿐인데 제주에서 평생 살아오신 두 분이 이사 온 지 반년밖에 되지 않은 내가 ‘우리’라는 말을 했다면서 웃는 것을 보고 내심 ‘아차!’ 싶었다. 그리고 한 가지 재미있는 호칭이 있는데 그것은 ‘삼춘’이라는 단어이다. 육지 사람들은 연세가 높으신 분들을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주 토박이들은 남녀 구분 없이 ‘삼춘’으로 부르며 알짜배기 제주 사람들만의 정겨움과 끈끈한 유대를 표현한다. 여하튼 육지에서 경험할 수 없는 제주도만의 특이한 문화와 천혜의 환경에서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경험들은 1년에 약 1,200만 명의 탐방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내가 사는 곳에서 30분 거리에 사려니 숲이 있다. 제주에는 더위를 식히며 신선함을 맛볼 수 있는 곳으로 바닷가 외에 절물 휴양림, 비자림, 서귀포 치유의 숲 그리고 돈내코 계곡처럼 널리 알려진 곳이 여러 군데 있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사려니 숲 탐방을 자주 즐기는 편이다. 입장료도 없고 주차하기도 편리한 이곳은 울창한 삼나무 조림이 형성되어 있어서 늘 많은 이가 찾는 곳이다. 곧게 높이 뻗어 있는 나무들 사이로 잘 놓여진 목조 데크(deck)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호흡하는 기분은 비할 데 없는 여기만의 힐링 선물이라 할 만하다.
올여름, 무더운 어느 날에도 아내와 함께 청량한 분위기를 맛보고자 이곳으로 향했다. 약 한 시간 동안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면서 걷기를 마치고 화장실에 작은 볼일을 보러 들어갔다. 볼일을 마치고 돌아서는 순간 부자지간으로 보이는 두 남성이 들어왔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둘 다 큰 볼일 때문에 들어온 것임을 알 수 있었고 강한 경상도 억양의 아버지는 60대 초반, 아들은 2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그런데 큰 볼일을 처리하는 세 칸 중 한 곳만 비어 있었다.
“니도 큰 기가?” 아들이 왠지 머뭇거리자 “빨리 말해라!” 다그치는 아버지를 향해 아들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곧이어 아버지의 하명(下命)이 아들에게 내려졌다. “그라모, 니가 먼저 들어가라!” 그러자 아들은 곧장 빈칸으로 문제를 해결하러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부자지간의 짧고도 사정이 급한 화장실 대화를 본의 아니게 듣고 난 후 손을 씻으면서 나도 몰래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첫째는 나도 경상도 출신인지라 경상도 아버지의 억양이 각별하였기 때문이고 둘째는 본인도 분명 다급한데 불구하고 아들에게 먼저 들어가라 양보하는 아버지의 자상한 하명이 내 머릿속에 잠재하던 부정(父情)에 관한 흐릿한 이론(理論)의 방(房) 한 켠을 밝히 비춰 주는 듯했기 때문이다.
화장실 입구를 나오면서 미소 띤 얼굴로 혼잣말을 되뇌는 나를 보고 아내가 무척 궁금했는지 날 보고 묻는다. “왜 웃어요? 볼일 보니 그렇게 기분이 좋아요?”
사려니 숲을 걸으며 호흡하는 피톤치드의 효과, 오가는 많은 이의 밝은 표정과 유쾌한 대화와 웃음소리들, 아빠 품에 안기거나 엄마 손에 이끌려 숲길의 신비로움에 감탄하는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 가족 단위로 탐방에 나선 삼삼오오 무리의 행복한 걸음걸이 등으로부터 직간접으로 얻어 가는 소중하고도 아름다운 것들만으로도 그곳을 다시 찾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아무리 대한민국 화장실이 깨끗하고 잘 관리되어 외국인들에게 상당한 칭송을 듣는다 해도 화장실은 화장실이다. 하지만 그날 탐방 막바지 화장실 그 좁은 공간에서 맞닥뜨린 유쾌한 만남은 내 평생 잊지 못할 상쾌한 추억이 되었다. 내 평생 그날의 순간처럼 기분 좋게 웃으며 화장실 문을 나선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다시 한번 깨닫는다.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이 향기 나거나 멋지지 않을지라도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향내를 실감하게 할 요소들은 우리 주변에 아직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5년 전에 사별한 아버지와의 많지 않은 추억이 이 가을날에 다시 아련히 떠오른다. 유난히도 말수가 적으시던 선친이셨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특별하게 보이는 길, 목회자의 길을 가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그 좋아하던 음주를 스스로의 결단으로 단번에 끊으시고 교회를 성실히 다니던 분이셨다. 대학 재학 시절, 아버지의 지인 한 분이 선물로 주신 고급 브랜드의 가디건 상의를 한 번도 입지 않으시고 아들인 나에게 건네주신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이 옷은 당신보다는 나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하시면서. 사실 그 옷은 당시 20대 중반인 나의 취향도 아니고 젊은 아들보다는 50대의 아버지에게 더 적합한 옷임에 틀림없었다. 그 당시 기억으로도 내가 그 옷을 받아 든 이유는 고급 브랜드였기 때문이었다. 충분히 사양하면서 아버지가 입으셔야 한다고 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30년 이상 그 옷을 아직도 입고 있다. 소매 끝이 닳아 올이 해진 것이 확연한데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찬기가 느껴지는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늦가을이 되면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자애로움이 그 옷에 또렷이 투영되기 때문이다.
한 달여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찬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지난 8월 방송에서 올겨울 한반도를 강타하게 될 한파를 걱정하는 예상 보도를 본 기억이 있다. 남한 면적 넓이의 북극 얼음 대륙이 녹은 여파로 북극 한파를 저지해 줄 제트기류가 밀려나면서 극심하게 차가운 냉기가 한반도를 덮치게 될 것이라는 보도였다. 갈수록 힘든 환경, 이상 기후로 인한 자연재해로 세계 전역이 두려움을 느끼며 올해도 지나가고 있다. 이곳 제주도민들도 지난겨울 영하 5도의 추위를 겪으면서 이제는 제주도에서도 냉해 피해를 염려하는 모습을 보았다.
불행한 소식이 하루도 쉴 날 없는 요즘에 부정(父情)의 감동이 더욱 그리워진다. 천하 모든 사람을, 그것도 선인(善人)과 악인(惡人)에게 햇빛과 비를 공평히 비추시고 내려 주신다는 하늘 아버지가 계신 하늘을 더욱 뚜렷이 올려다본다.
다른 어느 곳보다 몇 배나 자주 가 본 곳이지만 또다시 그 숲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다. 그날 들었던 부정(父情)의 짧은 대화를 기억하며 탐방길 초입부터 웃음 띤 얼굴로 걷고 싶은 마음이다.
- 김기수 표선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