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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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유산
용기와 자기희생의 이야기
데이비드 트림
존 네빈스 앤드루스와 그의 자녀 찰스와 메리는 본 교단의 첫 선교사였고, 앤드루스 가족의 출발 이후 재림교회 선교사의 해외 선교 여정이 이어졌다. 1875년 12월, 캐나다 재림교회 목사인 다니엘 부르도와 그의 아내 메리언이 앤드루스를 돕기 위해 스위스로 파견됐다. 1877년, 덴마크계 미국인 목사인 존 매티슨(욘 마테손)과 그의 아내 애나는 스칸디나비아로 파견됐다. 1878년, 존 러프버러와 그의 아내 애나는 영국으로 파견된 재림교회 최초의 선교사였다. 한편 1877년 11월, 윌리엄과 제니 잉스, 또 다른 여성 선교사인 모드 시슬리가 앤드루스를 지원하기 위해 스위스로 파견됐다. 다른 선교사들도 뒤이어 스위스, 스칸디나비아, 영국으로 속속 파견됐다. 1878년, 자급 사역자인 허버트 립턴은 아내 애들레이드, 딸 니나와 함께 이집트로 갔지만 1882년 립턴이 살해당하고 이집트 선교는 중단됐다. 1885년, 교단이 공식적으로 유럽 외 지역에 파견한 최초의 선교사 일행이 스티븐 해스컬의 지도 아래 미국에서 호주로 건너갔다. 2년 후, 도리스 로빈슨과 그의 아내 에드나가 이끄는 가운데 또 다른 대규모 일행이 남아프리카로 향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4대륙으로 뻗어 갔지만 행정 및 재정 문제로 1890년대에 선교 확장 속도가 느려졌다. 선교를 위한 교단의 주요 재편은 1901년 총회에서 이루어졌고, 1903년 총회에서 마무리됐으며, 그 후 매년 파견되는 선교사의 수가 극적으로 증가해 2차 세계 대전과 대공황을 제외하고는 70년 동안 계속 늘었다.
그러나 많은 선교사가 해외로 나가면서 비극적인 일화도 더 많아졌다. 20세기 초에는 온갖 열대성 질병이 만연한 곳에서 선교사들이 일해야 했고, 그중 많은 질병이 당시에는 치료법도 없었다. 이 때문에 순교한 선교사가 많았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한 명도 잊지 않으신다. 주목할 만한 점은 임무 수행 중에 쓰러진 선교사를 대체할 새로운 선교사가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또 놀랍게도 죽어 가는 선교사나 그들의 사랑하는 가족은 크나큰 상실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선교사가 해외 선교 사역에 합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03년 6월, 조지프 왓슨과 아내 메이블, 아들 로메인은 당시 니아살랜드(오늘날의 말라위)였던 말라물로 선교 기지에 도착했다. 슬프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지프는 뇌 말라리아에 걸려 1903년 12월 11일에 사망했다. 그는 말라물로에 묻혔고, 그의 시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곳에 안치되어 있다. 조지프는 선교사로 불과 6개월간 봉사했다.
조지프는 죽기 직전에 쓴 편지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이 거대한 대륙 아프리카에 저의 작은 희생으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알리게 되어 기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서 지켜보고만 있으면 주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듯합니다.”1
1905년, 찰스 이넉은 간호사인 아내와 어린 자녀와 함께 의료 선교사로 서인도 제도로 갔다. 이넉 가족은 1905년 11월 바베이도스에 상륙하여 브리지타운에 진료실을 열었다. 1906년, 그들은 남서쪽으로 200마일 떨어진 트리니다드의 포트오브스페인으로 이사했다. 찰스의 형 조지가 1901년부터 근무했던 곳이었다. 이넉 가족은 새로운 진료실을 열었지만 찰스 선교사는 1907년 2월 1일에 황열병에 걸렸고 2월 5일에 사망했다. 그는 카리브 연안에 불과 14개월 남짓 머물렀다.2
조지 이넉은 동생 찰스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그가 임무 수행 도중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후회하지 않으며 이 상실을 선교 활동이라는 제단에 우리 삶을 묶는 또 하나의 고리로 여깁니다.” 조지는 “우리의 마음은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라고 고백했지만 그가 진정 염려했던 것을 다음의 편지에서 엿볼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한 생각이 우리를 무겁게 짓누릅니다. 우리가 함께 일으켜 세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서인도 제도의 이 선교 사업이 헌신하는 일꾼의 부족으로 활기를 잃어버리게 될까 걱정입니다.”
모드 어밀리아 톰슨 박사는 아메리칸 의료 선교 대학(American Medical Missionary College)에서 해리 W. 밀러 박사의 동급생이었다. 그들은 1902년에 졸업했고 당시 모드의 나이는 22세에 불과했다. 두 의사는 1902년 7월 2일에 결혼했고, 1903년에 중국에서 선교사로 부름 받았다. 동료들에 따르면 모드는 중국 의상을 입기를 좋아했고 “매일” 치료받으러 오는 수많은 어린이와 여성을 돌보며 언어를 습득하고 복음을 가르치는 일에 열정을 쏟았다.
1904~05년 겨울에 모드는 열대성 질환인 스프루에 걸렸는데 이 병은 끔찍한 증상을 보였다. 하지만 동료 선교사들은 경탄했다. “병을 앓는 동안 그는 희망과 용기가 되는 말을 많이 했고 우리는 크나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녀가 병으로 고통당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길이 우리의 길 위에…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사명과 자기희생의 길에 바쳐진 헌신적인 삶의 씨앗이 하나님께 수분을 공급받아 우리의 왕이 다시 오시기 전 중국에서 영혼의 영광스러운 수확을 거두기 바랍니다.”3
앞서간 선교사들의 모범과 정신은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초기 재림교회 선교사들을 특징지었던 용기와 자기희생의 정신이 오늘날 재림교회 안에도 생생하게 흘러넘쳐 세 천사의 기별이 전 세계에 담대하게 선포되기를 바란다.
1 Michael W. Campbell, “Watson, Joseph H. (1869–1903) and Mabel Edith (Aldrich) (later Bailey) (1876–1964),” Encyclopedia of Seventh-day Adventists: https://encyclopedia.adventist.org/article?id=7JA1
2 The story of the Enochs is taken from D. J. B. Trim, A Living Sacrifice: Unsung Heroes of Adventist Mission (Nampa, Idaho: Pacific Press, 2019), pp. 50~51.
3 Ibid., 58~59
데이비드 트림(Ph.D.) 미국 메릴랜드주 실버스프링에 있는 대총회 자료·통계·연구사무소 책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