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위에 복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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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말라위의 선교 이야기는 수용과 성장의 이야기이다. 말라위라는 이름은 이 지역 고대 민족인 마라비에서 기원한다. 말라위가 독립하기 전의 이름은 니아살랜드였다. 오늘날 이 작은 나라는 ‘아프리카의 따뜻한 심장’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불린다. 말라위 인구는 1900년에 약 90만 명이었지만 오늘날은 2천만 명이 넘는다.1 이곳 전통 종교는 아프리카 전통 종교가 변형한 형태이다. 오늘날 말라위인의 약 80%가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말한다.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1859년에 말라위를 여행했고,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1861년에 들어왔다. 영국 출신으로 배틀크리크대학을 졸업한 조지 제임스가 1893년에 재림교회 독립 선교사로 말라위에 가서 마을을 돌며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노래하며 설교했다. 그러다 혼자서 선교 사업을 지속할 수 없어 짐바브웨 솔루시대회 선교사들과 합류하고자 말라위를 떠났다. 안타깝게도 가는 도중에 사망해 알려지지 않은 어느 무덤에 잠들어 있다.2
말라위는 남아프리카와 짐바브웨에 이어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재림교회 선교 사업의 혜택을 받는 국가이다. 1902년에 대총회가 제칠일침례교회로부터 플레인필드대회를 인수했다. 이 대회는 말라물로(‘계명’이라는 뜻)대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최초의 공식 재림교회 선교사는 토머스 브랜치3와 그의 가족 그리고 제임스 부스4였다.
성장 요인
1905년 대총회에서 A. G. 대니얼스 대총회장이 “니아살랜드, 로디지아, 중국, 한국, 실론, 터키, 이집트에 있는 선교사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늘리도록” 촉구하면서 말라위를 특별히 언급했다.5 시간이 지나면서 말라물로대회는 재림교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는데 조지핀 커닝턴 에드위즈가 쓴 글도 여기에 한몫했다. 선교 사업은 점차 교회 개척의 허브 역할을 하는 다른 선교지로 확대되었다. 1958년에 이 지역은 나중에 선교지로 재편되었고 이후에 합회가 되었다. 2023년 현재 말라위 연합 소속 교인은 71만 2,000명이다.6
말라위에서 재림교회 선교가 두드러지게 발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주된 이유는 말라위 지도부가 처음부터 열성을 다해 교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교회가 역동적으로 성장한 데 있다. 이 글은 선교 초기 단계를 중심으로 다루는 글이다. 이 단계에서 확립한 관례가 오늘날에도 계속 열매를 맺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장 요인으로 무엇이 있을까?
첫째, 성령님께서 선교사들의 사역 속에서, 복음의 초대에 응답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사역하셨다. 성령님이 없었다면 제일 좋은 방법도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둘째, 예로부터 믿어 왔던 창조주 하나님(‘물룬구’ 또는 ‘치우타’라고 한다.)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으로 강해졌다. 하나님께서 지역 주민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셔서 기독교를 수용하는 태도가 생기도록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한 삶, 가르침, 구원의 사역이 지역 주민들의 마음을 강하게 끌면서 종교적 경험을 넓혀 주는 새로운 요소로 작용했다.
셋째, 아주 재빠르게 지역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다. 사람들이 모국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자 복음에 대해 주인의식을 개인적으로 지니게 되었다. 따라서 말라위 문화 가치가 인정받게 된 것인데 토착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유효한 수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선교사가 쓰는 외국어를 알 필요가 없었다. 재림교회는 초교파 단체인 성서공회에서 번역한 성경의 도움을 받은 반면 그 외의 자료를 저술하고 번역하기도 했다. 1926년 말라물로대회에서 인쇄기가 가동되었다. 문서 판매와 배포는 말라위 선교 전략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요소가 되었다.
넷째, 몇 년 만에 토착어 성경을 사용하고, 말라위 문화적 관점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기별을 말라위 문화에 맞추어 받아들인 말라위인들이 다른 말라위인을 전도했다. 말라위 전도사와 목사들이 선교 허브에서 교회 개척지로 뻗어 나갔다.
다섯째, 성경을 주요 교과서로 사용해 글 읽기 기초를 가르치는 학교가 설립되었다. 말라물로에 학교가 처음으로 세워지고 토머스 브랜치의 딸 메이블이 말라위 최초의 재림교회 학교 교사로 일했다. 1905년에 해당 학교 출신 소년 7명이 침례를 받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 시스템이 확장되어 선교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여섯째, 목사, 교사, 의료 종사자, 석공, 목수가 훈련을 받았다. 초기 개종자 중에는 토머스 브랜치의 통역자였던 모리슨 말린키가 있었다. 말린키는 교사가 되었고 이후 목사로 봉사했으며 아들 제임스와 조셉이 그의 발자취를 따랐다. 제임스 말린키는 주변 국가에 교회를 세우는 다문화 선교사가 되었다. 교사와 목사를 양성하는 학교가 말라물로대회에 설립됐다. 목수와 석공은 마탄다니대회에서 훈련받았다.
일곱째, 제자 훈련 선교 모델이 활용됐다. 전도는 보통 장막부흥회에서 이루어졌는데 장막회를 통해 참석자들이 주변 교회에서 중심지로 모였다. 초청이 이루어지고 여기에 응답한 사람들은 1년 과정 ‘성경반’에 등록해 안식일학교 때 모교회에 모였다. 이후에 개최된 장막 집회에서 이들이 성경반을 졸업하고 ‘침례반’에 등록해 1년 더 모였다. 그리고 다음 장막 집회가 되면 정식 교인으로 침례를 받았다. 이 심층적인 접근 방식은 기독교 이전 시기의 구전(口傳) 사회에서 선교를 위한 훌륭한 발판이 되었다.
여덟째, 열대병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 현대 의료 서비스가 제공됐다. 1915년 간호사 아이린 푸리에가 진료소를 열었다. 칼 버켄스톡은 1925년 말라물로에서 진료하는 최초의 의사가 되었다. 나병 환자를 위한 전문 치료는 1926년에 시작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선교지와 외딴 지역 일부에 진료소가 설립되었다. 블랜타이어, 림베, 릴롱궤에 일반 및 치과 진료소와 병원이 문을 열었다. 조그맣게 시작한 재림교회 의료 사역은 말라위에 국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요한 위치에 올랐다. 이러한 서비스에는 일부 의료 전문 분야, 치과 치료, 간호사, 의료 보조원 및 실험실 기술자 교육이 따른다. 로마린다대학교 소속 ‘국제재림교회건강(Adventist Health International)’은 말라물로병원과 매우 중요한 파트너십을 맺어 현재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의사에게 재림교 외과 레지던트 교육을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교회 지도부가 외국인에서 말라위인으로 채워지는 현상이 처음에는 서서히 시작되었지만 꾸준히 탄력이 붙으며 확립되었다. 1929년에 목회자 5명이 처음으로 안수받았다. 말라위 교사와 목사는 초창기부터 막중한 책임을 맡았고 루와지대회와 룬키자대회는 말라위 교인들이 개척한 곳이다. 1964년에는 B. B. 은코시가 최초의 말라위 현지인 합회장이 되었다. 교회 행정을 말라위인이 맡게 되는 과정은 F. A. 보토마니가 1980년에 최초의 말라위 현지인 연합회장이 되면서 정점에 달했다.
미래를 향해
21세기를 내다보는 말라위 연합은 자국 내에서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능력과 전 세계 현장에서 봉사하는 역량이 탁월하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아프리카의 따뜻한 심장’을 축복하셨고, 말라위 재림교인들에게는 그분의 축복을 세상과 나눌 능력이 있다.
1 General population and demographic statistics are from internet sources
2 Doss, Gorden. “George James: Pioneer in the Malawi Work.” Adventist Review 170, no. 11 (November 11, 1993): 17~18
3 See https://encyclopedia.adventist.org/search-results?term=thomas+branch
4 Seventh-day Adventist Encyclopedia, vol. 2 (Hagerstown, MD: Review & Herald, 1996), 12-17; 178
5 Daniells, A. G. “Remarks to the General Conference Session.” Review and Herald 82, no. 19 (May 11, 1905): 9
6 Annual Statistical Report, 2024
고든 R. 로스(Ph.D.) 앤드루스대학교 세계선교학 명예교수이다. 1954년에 부모와 함께 말라위로 건너가 31년간 살면서 봉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