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재림교회 교리들에 대한 질문
질문 39 재림교회는 방언을 하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방언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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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재림교회는 성경상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인정합니다. 성경에 분명히 성령의 은사 중 하나로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즘 교회에서 하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방언”은 성령의 은사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사인 방언은 분명히 많은 사람이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였습니다(행 2:6-8). 그러나 요즘 교회의 방언은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생명 없는 소리”(고전 14:7)이며 “뜻 없는 소리”(고전 14:10)에 불과합니다. 방언이란 무엇인지,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무엇이며, 언제 왜 필요한 것인지 연구해 봅시다.
1. 방언은 과연 하늘의 언어인가? 그것은 과연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은사인가?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현대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껄임 같은 방언은 같은 종류의 것인가? 방언은 유익한 것인가 해로운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방언하기를 원하시는가 원하시지 않는가?
이런 어려운 문제들은 성령 선물 운동이 오순절 교회들뿐 아니라 기독교 대부분의 교회를 유행처럼 휩쓸었던 지난 몇 십 년 동안 많은 진실한 기독교인을 당혹하게 했던 문제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지성적인 비신자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회의와 환멸을 느끼도록 하는 요인도 되었던 심각한 문제 중 하나였습니다. 지성적인 비신자들이 보기에 기독교에서 가장 비이성적으로 보이고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이 바로 방언 현상입니다.
2. 그렇다면 방언이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방언 현상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성령이 제자들에게 충만하게 임했던 오순절 때였습니다(행 2장). 구약에 방언이라고 언급된 것들은 다 어떤 민족의 언어나 외국어들을 의미했습니다(창 10:5, 20, 31; 느 13:24; 단 1:4).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제자들이 말한 방언도 다 외국어 방언이었습니다. 최소한 15지역 이상에서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고향 말로 위대한 복음을 듣고 놀라 소리쳤습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행 2:8).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제자들이 맨 처음 받은 성령의 은사가 하필이면 방언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방언의 은사가 그 당시 그 환경에서 가장 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이었습니다. 즉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언어가 장애가 되었을 때 그 언어의 장애를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모국어로 복음을 듣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3. 오순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기 위하여 “그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행 2:5)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메시아이심과 그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새로운 구원의 도리를 전 세계에 전하기 위해서는 다시없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언어의 장벽이 있었습니다. 유대 땅을 떠난 지 오래되고 타향에서 태어난 유대인들(행 2:8)과 이방인들은 유대인의 언어에 익숙하지 못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이 언어의 다름은 복음 선포에 큰 장애가 될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적적인 방법으로 사도들의 부족을 보충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이 일생 동안에도 성취할 수 없었던 일을 그들을 위하여 행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듣는 사람들의 모국어로 강력하게 전파하였습니다. 그것은 잠시 동안이나마 언어의 혼란을 하나로 통일해 버린 바벨탑 이전으로의 회복이었습니다. 이것이 오순절에 방언의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특별한 목적을 위해 특별한 사정 아래서 주신 특별한 은사였습니다.
4. 방언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신 후 처음으로 나타난 현상이 방언이었으므로(행 2:4; 10:46; 19:6) 오늘날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들도 방언을 말하는 것이 당연히 성서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도행전의 세 경우는 다 방언이 주어질 만한 중대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습니다. ① 오순절의 방언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도의 목적과 아울러 하나님께서 성령의 강림을 강하게 인상 짓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②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방언(행 10:46)은 이방인을 꺼려 하고 하나님의 뜻에 회의를 가지고 있는 베드로 일행에게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똑같이 이방인에게도 차별 없이 같은 성령을 내려 주신다는 것을 강하고 확실하게 알리시기 위하여 주셨습니다. ③ 에베소 교인들(행 19:6)은 요한의 침례만 받았을 뿐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설명해 주고 안수하여 성령을 받도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체험도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의 체험과 연결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침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방언을 말해야 한다는 주장은 성서적 근거가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성령 충만이 있었으나 방언 현상이 없었던 경우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행 4:8; 6:5; 7:55; 9:17; 13:9; 13:52). 오순절에 3,000명이 믿었으나 방언을 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5,000명의 회심에도 그런 언급이 없습니다(행 4:4). 모든 사람이 다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말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기독교 교리의 정수를 말하면서 로마서에 단 한 번도 방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보다 후대에 쓰여진 로마서(롬 12:6)와 에베소서(롬 4:11, 12)에는 방언의 은사가 전적으로 생략되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영적인 기도를 많이 드리신 예수께서 방언으로 기도하셨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입니다.
5. 하나님께서는 현대 교회들이 성령의 침례를 받은 증거로 강조하는 방언을 과연 필요로 하시는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즐기기 위하여 꼭 방언을 할 줄 알아야 하는가? 오늘날 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비정상적인 방언 현상이 과연 성령 충만의 증거일까?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성경 학도들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지껄이는 방언은 거의 모든 종교에 공통된 원시적인 일반 현상으로서 언어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전혀 언어적 특징이 없는 생명 없는 소리요 허공에다 외치는 공허한 자기 소리일 뿐입니다. 모든 은사 중에서 특히 방언의 은사가 가장 모방하기 쉬운 것이었습니다. 발성 기관은 하나님만이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방언 현상은 헬라 신의 축제나 강신술, 힌두교 그리고 이슬람교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은 귀신 같은 분이 아니시고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항상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헛소리로 표현된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뜻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런 비정상적인 지껄이는 방언을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고 분명히 믿을 수 있습니다. 모국어인 한국어를 놔두고 방언으로 해야만 하나님께서 인상 깊게 들으시며 기도의 효과가 있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큰 오해이며 불신입니다. 오늘날의 소위 방언은 통역을 세워도 어지러운 언어의 분열이요 무질서의 표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비정상적인 소음 속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방언이 전혀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여 성령의 은사를 제한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오순절과 같은 방언 현상은 특수한 사정과 환경에서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현대의 방언은 삽시간에 전 세계에 퍼져 나가는 신문, 잡지 등 출판물과 하나님의 말씀을 순식간에 온 세상에 전달하는 라디오나 텔레비전, 인터넷 그리고 수백 개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일는지도 모릅니다.
방언은 모든 영적 은사 중 제일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영구적인 것도 아니었고 한 번 획득하면 계속되는 소유물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온 천하에 복음을 전파하고 확신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특별한 목적을 위해 특별한 환경에서 주어진 특별한 은사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구원의 증거도 아니며 높은 영성의 표현도 아니고 성령 침례의 객관적 표적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부 교회에서 방언을 해야만 영적으로 축복받은 것처럼 인식시키고 있는 것은 성서적이 아니며, 분리와 모방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값싼 표적에만 매달리는 미숙하고 위험한 그리스도인을 양산할 염려가 다분히 있는 것입니다.
1. 방언은 과연 하늘의 언어인가? 그것은 과연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은사인가?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현대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껄임 같은 방언은 같은 종류의 것인가? 방언은 유익한 것인가 해로운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방언하기를 원하시는가 원하시지 않는가?
이런 어려운 문제들은 성령 선물 운동이 오순절 교회들뿐 아니라 기독교 대부분의 교회를 유행처럼 휩쓸었던 지난 몇 십 년 동안 많은 진실한 기독교인을 당혹하게 했던 문제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지성적인 비신자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회의와 환멸을 느끼도록 하는 요인도 되었던 심각한 문제 중 하나였습니다. 지성적인 비신자들이 보기에 기독교에서 가장 비이성적으로 보이고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이 바로 방언 현상입니다.
2. 그렇다면 방언이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방언 현상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성령이 제자들에게 충만하게 임했던 오순절 때였습니다(행 2장). 구약에 방언이라고 언급된 것들은 다 어떤 민족의 언어나 외국어들을 의미했습니다(창 10:5, 20, 31; 느 13:24; 단 1:4).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제자들이 말한 방언도 다 외국어 방언이었습니다. 최소한 15지역 이상에서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고향 말로 위대한 복음을 듣고 놀라 소리쳤습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행 2:8).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제자들이 맨 처음 받은 성령의 은사가 하필이면 방언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방언의 은사가 그 당시 그 환경에서 가장 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이었습니다. 즉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언어가 장애가 되었을 때 그 언어의 장애를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모국어로 복음을 듣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3. 오순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기 위하여 “그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행 2:5)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메시아이심과 그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새로운 구원의 도리를 전 세계에 전하기 위해서는 다시없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언어의 장벽이 있었습니다. 유대 땅을 떠난 지 오래되고 타향에서 태어난 유대인들(행 2:8)과 이방인들은 유대인의 언어에 익숙하지 못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이 언어의 다름은 복음 선포에 큰 장애가 될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적적인 방법으로 사도들의 부족을 보충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이 일생 동안에도 성취할 수 없었던 일을 그들을 위하여 행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듣는 사람들의 모국어로 강력하게 전파하였습니다. 그것은 잠시 동안이나마 언어의 혼란을 하나로 통일해 버린 바벨탑 이전으로의 회복이었습니다. 이것이 오순절에 방언의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특별한 목적을 위해 특별한 사정 아래서 주신 특별한 은사였습니다.
4. 방언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신 후 처음으로 나타난 현상이 방언이었으므로(행 2:4; 10:46; 19:6) 오늘날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들도 방언을 말하는 것이 당연히 성서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도행전의 세 경우는 다 방언이 주어질 만한 중대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습니다. ① 오순절의 방언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도의 목적과 아울러 하나님께서 성령의 강림을 강하게 인상 짓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②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방언(행 10:46)은 이방인을 꺼려 하고 하나님의 뜻에 회의를 가지고 있는 베드로 일행에게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똑같이 이방인에게도 차별 없이 같은 성령을 내려 주신다는 것을 강하고 확실하게 알리시기 위하여 주셨습니다. ③ 에베소 교인들(행 19:6)은 요한의 침례만 받았을 뿐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설명해 주고 안수하여 성령을 받도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체험도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의 체험과 연결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침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방언을 말해야 한다는 주장은 성서적 근거가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성령 충만이 있었으나 방언 현상이 없었던 경우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행 4:8; 6:5; 7:55; 9:17; 13:9; 13:52). 오순절에 3,000명이 믿었으나 방언을 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5,000명의 회심에도 그런 언급이 없습니다(행 4:4). 모든 사람이 다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말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기독교 교리의 정수를 말하면서 로마서에 단 한 번도 방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보다 후대에 쓰여진 로마서(롬 12:6)와 에베소서(롬 4:11, 12)에는 방언의 은사가 전적으로 생략되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영적인 기도를 많이 드리신 예수께서 방언으로 기도하셨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입니다.
5. 하나님께서는 현대 교회들이 성령의 침례를 받은 증거로 강조하는 방언을 과연 필요로 하시는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즐기기 위하여 꼭 방언을 할 줄 알아야 하는가? 오늘날 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비정상적인 방언 현상이 과연 성령 충만의 증거일까?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성경 학도들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지껄이는 방언은 거의 모든 종교에 공통된 원시적인 일반 현상으로서 언어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전혀 언어적 특징이 없는 생명 없는 소리요 허공에다 외치는 공허한 자기 소리일 뿐입니다. 모든 은사 중에서 특히 방언의 은사가 가장 모방하기 쉬운 것이었습니다. 발성 기관은 하나님만이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방언 현상은 헬라 신의 축제나 강신술, 힌두교 그리고 이슬람교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은 귀신 같은 분이 아니시고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항상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헛소리로 표현된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뜻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런 비정상적인 지껄이는 방언을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고 분명히 믿을 수 있습니다. 모국어인 한국어를 놔두고 방언으로 해야만 하나님께서 인상 깊게 들으시며 기도의 효과가 있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큰 오해이며 불신입니다. 오늘날의 소위 방언은 통역을 세워도 어지러운 언어의 분열이요 무질서의 표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비정상적인 소음 속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방언이 전혀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여 성령의 은사를 제한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오순절과 같은 방언 현상은 특수한 사정과 환경에서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현대의 방언은 삽시간에 전 세계에 퍼져 나가는 신문, 잡지 등 출판물과 하나님의 말씀을 순식간에 온 세상에 전달하는 라디오나 텔레비전, 인터넷 그리고 수백 개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일는지도 모릅니다.
방언은 모든 영적 은사 중 제일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영구적인 것도 아니었고 한 번 획득하면 계속되는 소유물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온 천하에 복음을 전파하고 확신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특별한 목적을 위해 특별한 환경에서 주어진 특별한 은사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구원의 증거도 아니며 높은 영성의 표현도 아니고 성령 침례의 객관적 표적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부 교회에서 방언을 해야만 영적으로 축복받은 것처럼 인식시키고 있는 것은 성서적이 아니며, 분리와 모방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값싼 표적에만 매달리는 미숙하고 위험한 그리스도인을 양산할 염려가 다분히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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